“친정팀서 쫓겨날 땐 다 끝장난 줄 알았다”
김태군은 자신이 스승복이 많다며 김경문 NC 감독과의 찰떡 궁합을 자랑했다. 사진제공=NC 다이노스
―1989년생인데, 그 나이로 보는 사람 있나요.
“하하, 처음부터 질문이 ‘훅’ 들어오는데요? 절대 그 나이로 안 보죠. 대부분 제가 서른 살은 넘었다고 생각해요. 억울하냐고요? 처음에는 당연히 억울했죠. 그러나 이젠 그러려니 해요. 제가 (나)성범이랑 동갑이거든요. (기자의 놀라는 표정을 보면서) 안 믿겨지시죠? 진짜 동갑이라니까요. 제 나이 때의 선수들이 야구 잘하고 있어요. 성범이를 비롯해 노진혁, 민성기 등. 한참 치고 올라가는 선수들이에요.”
―원래 포지션이 포수였어요.
“고3 때부터 포수를 맡았어요.”
―왜 바꾼 거예요.
“야구하던 중 수비하다가 축구 골대에 머리를 박았어요. 4일 동안 어지러워서 뛰질 못했죠. 그 일 이후로 달리기가 안 되더라고요. 오래달리기는 할 만 한데, 순간 스피드를 내 달리는 게 안 됐어요. 그 전에는 외야를 맡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포지션을 바꿨죠. 재미있는 사실은 포수가 앉아 있는 원 안에서 움직이는 건 남들보다 빨라요.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죠. 포수를 맡으려고 축구 골대에 머리를 박았나 싶더라고요(웃음).”
―포수는 육체적으로 힘들잖아요.
“저는 정신적으로 더 힘든 것 같아요. 야수들은 오늘 경기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포수는 오늘 경기를 지켜보면서 내일 경기에 집중할지, 아니면 내일 모레 시합에 올인할지를 결정해야 하거든요.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각과 조절이 중요해요. 오늘 경기를 버리고 두 번째, 세 번째 경기를 지키려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부분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해요.”
―그걸 어떻게 결정해요.
“우리 팀 상황만 보지 않아요. 상대팀의 페이스가 너무 좋다, 그러면 한 게임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 페이스를 우리 쪽으로 바꿔 놔야 하거든요. 그래야 1승을 버리고 2승을 거둘 수 있으니까. 그럴 때는 타자들 몸 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타자들이 움찔해서 피하게끔. 위협구를 많이 던지게 해야 타석에서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포수는 정말 머리 많이 쓰는 포지션이에요.”
김태군의 평상시 모습은 엄청 산만하다. 그런데 야구에 대한 자세를 듣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래서 그의 지인들은 야구할 때만 천재이고, 나머지는 그 반대라고 얘기한다. 김태군은 추신수의 모교인 부산고 출신이다. 고 조성옥 감독의 부산고 시절 마지막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조 감독이 부산고에서 동의대로 옮겨가기 전까지 조 감독 밑에서 야구를 배웠다. 맞아가면서 야구를 했다고 한다. 당시의 경험이 그의 야구 인생에 좋은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조 감독 밑에서도 훈련했는데 억울해서라도 이 정도의 훈련을 버텨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는 것. 김태군은 조 감독을 영원한 스승이라고 말한다.
사진제공=NC 다이노스
“2차 3라운드 17번으로 지명을 받았는데, 당시 포수 중에는 제가 제일 일찍 뽑혔어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전 지명 받은 사실을 잠자다가 들었어요. 다음날 봉황대기 시합이 있어서 선수들이 이동하려고 버스에 짐을 실어 놨거든요. 출발 전에 잠깐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후배들이 막 깨우는 거예요. 지명됐다면서. 그런데 전 드래프트가 다음날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후배들이 장난치는 줄 알고 ‘시끄럽다’고 소리치고(웃음). 문자가 막 오는 걸 보고, 그제야 후배들 말이 진짜인 줄 알게 됐죠. 당시 성범이가 LG에 2차 4순위(전체 32순위)에 지명됐어요. 저보다 늦은 번호였죠. 그런데 프로 대신 대학(연세대)으로 가는 바람에 성범이가 NC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 인생이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LG 입단했을 때 굉장히 설레었겠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생활 터전을 옮기는 건 ‘가문의 영광’이었죠.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했어요. 제가 서울 생활을 하는 게. 야구하다 힘들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 번의 기회는 찾아 올 거야’라고 생각하며 참고 버텼거든요. 그 ‘한 번의 기회’가 LG 입단이라고 당시엔 착각했었어요. 엄청난 착각이었죠.”
―왜요? 왜 착각이었던 거죠?
“김정민 코치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후 2009년부터 1군에서 생활했어요. 그러다 조인성 심수창 선배 사건으로 조인성 선배가 2군으로 내려가면서 풀타임 출전 기회를 가질 수 있었죠. 고졸 신인 포수가 바로 1군에 오른 건 (강)민호 형 이후 제가 처음일 거예요. 그러다보니 제가 잘난 줄 알고 정신을 못 차렸어요. 그게 고스란히 저에게 돌아왔죠. 이후 2군으로 내려갔으니까. 김정민 코치가 그때 하신 말씀이 있어요. ‘포수가 왜 스타가 되려고 하느냐’라고. 전 포수라고 해서 스타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100경기에 출전하고, 이후 팀을 옮기면서 코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LG 신인 시절, 어린 나이에 1군을 경험했던 게 약이자 독이 됐던 거죠.”
―2012년 1군 100경기에 출장했고 올스타에도 선정되었지만,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그 덕분에 NC 전력보강 선수로 지명 받아 이적했어요. 성적에 비해 보호선수 명단 제외는 충격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 해 100게임에 출전했고, 성적도 나쁘지 않은 터인데 그런 결과가 나타났으니까요. 마음이 심란했어요. 자꾸 밀려난다는 느낌도 받았고. NC 입단 후 김경문 감독님이 선배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셨어요. 그때 감독님께서 저에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하고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그때 가슴 속 깊이 쌓여 있는 묵은 찌꺼기들이 쑥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부산에서 서울 갈 때는 프로 신인의 떨림이, 서울에서 마산으로 내려올 때는 이 팀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감독님은 제게 그걸 바라셨던 것 같아요.”
―김경문 감독이 포수 출신이라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물론 처음에는 긴장을 많이 했어요. 감독님이 무섭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감독님이 편해졌어요. 형들은 여전히 감독님을 어려워해요. 저에게 ‘대단하다’는 말도 해요. 감독님이랑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하다고도 말하고. 그런데 감독님이 정말 잘해주시거든요. 생각해보면 저랑 감독님이랑 그리고 우리 팀이 모든 게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김경문 감독한테 혼난 적은 없었어요.
“있었죠. 지난 시즌 때의 일인데, 연승을 달리고 있었거든요. 하루는 감독님이 절 부르시더라고요.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갔죠. 잘한다고 칭찬 받을 줄 알고요. 그런데 감독님이 절 앉혀 놓으시고선 ‘너가 잘하고 있는 줄 아느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절대 만족하지 말아라. 왜 벌써 만족하려고 하느냐’며 호통을 치셨어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죠. 처음 NC 왔을 때 실수가 발생하면 스스로 눈치를 봤어요. 삼진 먹고 들어오면 고개 푹 숙이고 있고.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고 나서 감독님이 해주셨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는 말씀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어요. 제 가슴에 팍 꽂혔어요. 그 다음부터는 실수를 해도 당당하게 감독님 앞을 지나가요. 삼진 먹어도 마찬가지고. 뻔뻔해지려고 노력했던 거죠. 제가 인복이 많은 편이에요. 살면서 제 야구에 도움 되는 스승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부분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6월 24일이었습니다(웃음). 외국인 선수가 KBO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은 찰리가 처음이었고, 14년 만에 나온 노히트 노런에 포수 김태군이 올라갔다는 사실도 의미가 큰 부분이에요. 포수라고 아무나 그런 기록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찰리가 마운드에 오르기 전 불펜 피칭할 때만 해도 볼이 좋지 않았어요. 그때 강인권 코치님하고 얘길 나눴던 부분이 5회까지만 버티자는 거였어요. 우리 팀의 중간 계투가 좋으니까 5회까지 버티고 6회부터 승부를 보자 했었는데 이닝이 더해갈수록 공이 좋아지는 거예요. 6회 끝날 때까지만 해도 노히트인 줄 몰랐습니다. 7회 들어가니까 ‘H’ 공간에 ‘0’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그러다 8회 위기를 맞이했어요. 볼넷을 주고 나니 타자가 조쉬 벨인 거예요. 운 좋게 땅볼로 아웃되면서 9회에 욕심을 내도 되겠다 싶었죠.”
―그런데 상대팀이 LG이다 보니 더 관심을 불러 일으켰어요.
“그러게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전 LG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저를 프로라는 곳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 팀이거든요. 아무 것도 아닌 선수를 스카우팅 리포트만 보고 지명해줬잖아요.”
―지난 시즌에는 골든글러브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며 주목을 받았어요.
“그러게요. 시골 놈이 출세한 셈이죠. 구단에서는 후보로만 이름을 올리고 상을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어요. 언제 후보에라도 오르겠어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그런 시상식에 멋진 양복 입고 가보고 싶었어요. 레드 카펫도 밟아보고 싶었고. 원 없이 누렸죠. 상은 못 받았고(웃음).”
―올 시즌 처음으로 억대 연봉(1억3500만 원)에 올랐는데, 소감이 어떤가요.
“지난해에 8000만 원 받다가 1억 원을 돌파했으니 기분 최고죠. 돈을 많이 받을수록 책임감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안주하면 안 되잖아요. 제 포지션에서 저보다 더 많이 받는 선수가 있기 때문에 그를 이기려면 해마다 꾸준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요.”
―올 시즌 우승까지 갈 수 있을까요.
“글쎄요. 모든 팀들의 목표가 우승 아닐까요? 그런데 전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과정 없는 결과는 쉽게 무너질 수 있지만, 과정이 단단하다면 어떤 결과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죠. 개인적인 목표라면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과정을 통해 우리 팀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자서전 쓴다면 기록하고 싶은 투수 원종현, 이동현 두 형님 시련 딛고 우뚝 ‘뭉클’ 만약 은퇴 후 김태군이 자서전을 쓴다면 김태군은 자신이 호흡을 맞춘 여러 투수들 중 어떤 선수를 자서전에 기록해 넣을까. 이에 김태군은 2명의 투수를 꼽았다. “NC 선수 중에는 (원)종현이 형이에요. 지난 시즌 LG와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 종현이 형이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어요. 2패를 하고 3차전을 맞이한 터라 우리로선 1승이 아주 소중했죠. 그런데 형이 155㎞의 공을 던지더라고요. 마치 타자를 잡으려고 던지는 게 아닌 날 죽이려고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매일 재활만 하던 형이 마운드에서 155㎞를 던지니까 엄청 감동이었어요. 1승3패로 끝난 준플레이오프였지만, 3차전에서 거둔 1승은 우리 팀에 매우 의미있는 1승을 안겨줬지요.” 당시 NC는 원종현의 역투에 힘입어 창단 최초로 포스트시즌 첫 승리를 거뒀다. 그랬던 원종현이 현재 대장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이에 대해 김태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4년이란 재활 기간도 잘 버텨냈는데, 대장암 종양을 제거한 수술은 가뿐하게 극복해 낼 것이고, 곧 선수들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한 명의 투수는 LG (이)동현이 형이에요.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에만 5~6년의 시간을 투자했어요. 수술도 세 차례나 받았고. 얼마나 고통스런 시간들이었을까 싶어요. 그 오랜 시간을 극복한 후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형을 보며 존경심이 들 정도였죠. 형이 힘들게 보낸 시간들을 LG 시절,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형의 재기가 더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르죠.”[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