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문의 영광> | ||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보석과 같은 시나리오도 때로는 제작자의 안목이 부족한 탓에 쪽박과 같은 시절을 보내기도 한다. 최근 1년간 흥행 대박을 터뜨린 영화들을 중심으로 알려지지 않은 ‘시나리오 수난사’와 영화 제작 뒷얘기들을 모아보았다.
2002년 영화계 최대의 이변 가운데 하나라면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를 꼽을 수 있다. 전국적으로 4백19만 관객이 들었던 이 영화는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극장에 오는 ‘기현상’을 유행시키며 흥행에 성공했다. 39회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기획상, 각본상 수상으로 작품성까지 인정받고 최근 ‘네티즌이 뽑은 2002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 <집으로>의 시나리오는 제작사의 찬밥 대우 속에서 무려 1년여 동안이나 햇볕을 쬐지 못했다.
데뷔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청룡영화제 시나리오상, 춘사영화제 창작각본상 등을 받으며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역량도 발휘했던 이정향 감독. 그녀가 <미술관…> 다음 작품으로 내심 낙점한 영화가 바로 <집으로>였다. 이 감독은 이미 완성해 놓은 시나리오를 들고 <미술관…>의 제작사 씨네2000을 찾아갔다.
이미 한 번 호흡을 맞춘 사이니 당연히 ‘OK’ 사인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도 크게 빗나갔다. 씨네2000측이 시나리오를 훑어본 뒤 ‘흥행성과 작품성이 없다’는 이유를 퇴짜를 놓은 것. 제작사를 깊이 신뢰하고 있던 이 감독으로선 무척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이 감독은 다른 제작자에게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 후 1년 동안 <집으로>의 시나리오는 장롱 속에 묵혀 있는 신세가 됐다. 그 뒤 외할머니의 작고를 계기로 다시 <집으로>의 촬영 의지를 가다듬은 이 감독은 또 다른 영화제작사인 튜브엔터테인먼트를 찾아갔다. 놀랍게도 시나리오를 건넨 바로 다음날 튜브엔터테인먼트측은 ‘꼭 제작하고 싶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이날의 통화는 결국 흥행대박으로 이어졌다.
▲ <품행제로> | ||
<가문의 영광>은 애초의 시나리오에서 많은 수정을 거친 사례. 시나리오 초안에는 서울대에 대한 강한 비판과 풍자의식이 있었고 주연급인 유동근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정흥순 감독은 “처음엔 이 영화를 통해서 학벌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과 풍자를 하고 싶었다. 특히 서울대를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글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생들의 회식 장면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장면에는 술에 취한 채 내뱉는 ‘한국 사회는 우리가 이끌어간다’는 투의 ‘거만한’ 대사들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 하지만 제작자는 현실에 대한 풍자보다는 강한 흥행코드를 원했고 결국에 이 장면은 시나리오에서 삭제가 되고 말았다.
유동근의 캐스팅 뒤에는 정 감독의 뛰어난 ‘선구안’이 있었다. 내심 맏형 역에 유동근을 떠올린 정 감독은 제작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에 알리지 않고 먼저 개인적으로 그와 접촉했다. 유동근의 ‘반허락’을 얻어낸 정 감독은 그때서야 맏형 역으로 유동근을 추천했다고 한다. 제작사는 ‘의외의 빅 카드’라고 반색을 했지만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유동근의 네임밸류와 인기에 비하면 영화 속에서의 비중이 너무 작았던 것. 그때부터 부랴부랴 대사와 역할에 대한 대수술이 벌어져 극중 역할과 대사가 불어났다.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영화 <품행제로>는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 이중의 산고를 겪은 경우. 애초에 제작사 KM엔터테인먼트가 영화로 만들려 했던 시나리오는 <명랑만화 권법소년>.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에 각색팀까지 만들어 수정작업을 벌였지만 제작사측은 선뜻 영화화를 결정하지 못했다. KM측은 1년이나 시간을 끈 후 결국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다시 쓰자’고 최종 결정을 내렸고 그때부터 <품행제로>의 시나리오 작업이 다시 시작됐다.
당시 제작자는 ‘복고풍의 밝고 명랑하며 액션이 가미된 영화’를 전체 컨셉트로 잡았다. 이 작품을 쓴 시나리오 작가 이해준•이해영씨는 “처음 시나리오가 완성됐을 때에도 감독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선뜻 OK사인을 내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가려던 감독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그 후 작가와 감독, 기획사 간에 의견조율이 잘 돼서 큰 문제없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당시 감독이 시나리오에 지나치게 ‘딴지’를 걸었다면 현재의 <품행제로>가 이끄는 인기몰이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남훈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