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이닝짜리’ 방수원 대체 투입돼 대기록
올 시즌에도 그렇게 값진 선물을 받은 투수가 한 명 나왔다. 두산 유네스키 마야가 지난 4월 10일 잠실 넥센전에서 노히트노런을 작성했다. 한국 프로야구 34년 역사에서 단 12번밖에 나오지 않은 대기록.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마야의 포효와 눈물은 그래서 더 짜릿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렇다면 마야보다 먼저 한국 야구팬들에게 노히트노런의 환희를 선사했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 사상 첫 노히트노런
기록에 얽힌 비화도 재미있다. 방수원은 그 경기 전까지 늘 2이닝씩만 던지던 투수였다. 갑자기 선발 한 자리가 ‘펑크’나면서 대신 투입됐지만, 그날 역시 2회까지 마치고 ‘내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그아웃에 돌아와 스파이크도 갈아 신었다. 그런데 벤치에서 더 던지라고 했다. 심지어 4회와 6회 선두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는데도 교체하지 않았다. 그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언제 내려가는 것일까’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안타를 하나도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노히트노런은 한국 프로야구의 첫 역사이자 방수원에게는 유일한 완봉, 그리고 마지막 완투였다. 방수원은 훗날 “노히트노런보다 완투를 해냈다는 게 더 기뻤다. 내가 2이닝짜리 투수가 아니라, 믿고 맡겨만 주면 나도 완투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사실이 더 흥분됐다”고 털어 놓았다.
# 가장 완벽했던 노히트노런
정민철
8회 첫 타자도 무사히 잡았다. 이어진 심정수의 타석. 볼카운트 1B(볼)-2S(스트라이크)에서 심정수가 헛스윙을 했다. 다만 공이 포수 사인과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바깥쪽 공을 기다리던 강인권은 몸쪽 높은 코스로 공이 날아오자 급히 미트 위치를 바꿨다. 그 미트에 공이 맞고 뒤로 흘러가면서 스트라이크아웃낫아웃 출루. 투수코치가 올라와 “하던 대로만 하라”고 다독였다. 정민철은 그 후 나머지 아웃카운트 5개를 무사히 잡아냈다. 8회 중견수 대수비로 투입된 전상열이 9회 1사 후 이종민의 안타성 타구를 슬라이딩으로 잡아내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28명의 타자를 상대로 완성된 무4사구 노히트노런. 퍼펙트게임 문턱까지 갔던 역대 가장 ‘완벽한’ 노히트노런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 유일한 포스트시즌 노히트노런
분명히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12번으로 집계된 역대 노히트노런 계보 안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정규시즌이 아닌 한국시리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996년 10월 20일 인천구장에서 노히트노런을 작성한 현대 정명원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김재박 감독이 지휘하던 현대는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쌍방울과 한화를 꺾고 기세 좋게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그러나 해태에 1승2패로 수세에 몰리자 파격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해태전에 유독 강했던 마무리투수 정명원을 4차전 선발로 예고한 것이다.
초반은 오히려 위기였다. 1회 이종범과 동봉철을 각각 볼넷과 몸에 맞는 볼로 내보냈다. 다행히 희생번트로 이어진 1사 2·3루서 다음 타자들을 삼진과 파울플라이로 처리했다. 고비를 넘긴 강심장 투수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무안타 9삼진 무실점으로 승승장구했다. 현대 역시 해태 선발 이대진의 호투에 밀려 7회까지 0-0으로 고전했지만, 8회 결국 4점을 뽑아 승리를 가져갔다. 역대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시리즈 노히트노런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사연 없는 노히트노런은 없다
송진우가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후 강인권 포수와 포옹을 하고 있다. 사진 위는 이동석.
빙그레 이동석(1988년 4월 7일)은 팀이 해태 선동열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기 위해 ‘밑져야 본전’으로 내민 카드였다. 그런데 무명 투수의 깜짝 노히트노런이 선동열의 9이닝 1실점 완투를 꺾었다. 선동열(1989년 7월 6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지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기록이라 상대적으로 덜 화제가 됐다.
삼성 이태일(1990년 8월 8일)은 신인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해냈다. 쌍방울 김원형(1993년 4월 30일)은 당시 20세 9개월 25일에 불과했다. 최연소 노히트노런 기록은 여전히 그의 몫이다. LG 김태원(1993년 9월 9일)은 잠실구장 첫 노히트노런에 성공했고, 한화 송진우(2000년 5월 18일)는 현재까지 노히트노런을 경험한 마지막 국내 투수다.
# 용병들이 재개한 노히트노런
한국 프로야구 통산 12번째 노히트노런의 주인공 마야와 양의지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사진제공=두산 베이스
송진우의 10호 노히트노런 이후 15년이 흐른 지난해 4월 24일 잠실구장. 마침내 꽉 막혔던 물꼬가 다시 터졌다. NC 외국인투수 찰리 쉬렉이 통산 11번째이자 용병으로서는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LG를 상대로 9이닝 동안 단 3개의 볼넷만을 내주면서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다시 마야의 통산 12번째 노히트노런이 나왔다. 특히 마야는 이동석과 함께 역대 단 둘뿐인 1-0 노히트노런의 주인공으로 남았다. 공 110개로 게임을 끝낸 찰리와 달리, 마야의 기록은 좀 더 극적이었다. 총 136구를 던지며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았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8회에 110개를 넘기면서 투구수가 너무 많다고 얘기하러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하늘이 주신 기회다. 계속 던지겠다’고 말하는 마야의 눈빛을 보고 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내려왔다”고 귀띔했다. 마야는 결국 기록 달성에 성공한 뒤 눈물을 펑펑 쏟았다.
# 국내 투수들은 왜 못 하나
타자들이 최대한 공을 많이 보는 한국 야구의 특성도 투수들의 투구수를 늘리는 원인이다. 한 투수코치는 “5회만 되면 투구수 100개가 넘는 투수들이 여럿이니 완투 자체가 어렵다”며 “어차피 기록은 투구수 싸움인데 타자와 힘 대 힘으로 붙어서 이겨내는 투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제구력 위주로 공을 던지게 되고, 유리한 볼카운트에서도 자꾸 유인구를 던지려고만 한다”고 아쉬워했다. 과연 송진우의 바통을 이어 받을 국내 투수는 누가 될까.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노히트노런 포수들 거사 도운 안방마님들 공룡군단에 다 몰렸네 노히트노런의 스포트라이트는 공을 던진 투수에게 쏟아진다. 그러나 함께 호흡을 맞춘 포수의 야구인생에도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남는다. KBO 공식 ‘레코드북’에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의 이름 옆에 포수의 이름도 나란히 명시돼 있다. 던지는 공을 받아주는 이가 있어야 노히트노런도, 퍼펙트게임도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지금까지 노히트노런을 경험한 포수는 총 11명. 유승안과 강인권이 각각 두 차례씩 이름을 올리는 기쁨을 누렸다. 유승안은 1호 방수원과 4호 이동석의 기록을 합작했고, 강인권은 9호 정민철과 10호 송진우의 노히트노런을 함께 완성했다. 김경문(투수 장호연), 장채근(선동열), 이만수(이태일), 김충민(김원형), 김동수(김태원), 김태군(찰리), 양의지(마야)가 KBO 역사에 노히트노런 포수로 기록됐다. 한문연과 김용운은 김정행의 2호 노히트노런을 나눠 받은 포수들. 투수의 기록이 진행 중일 때는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포수를 잘 교체하지 않지만, 이들만은 예외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NC 한 팀에만 세 명의 노히트노런 포수가 몸담고 있다는 것. 김경문 감독, 한문연 2군 감독, 김태군 선수가 모두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다. 좋은 포수의 역할은 노히트노런과 같은 ‘거사’를 앞두고 있을 때 더 빛난다. 포수도 투수만큼 떨리지만, 절대 내색해서는 안 된다. 잔뜩 긴장한 투수를 다독이고 침착하게 리드하는 게 포수의 역할이다. 노히트노런 2회를 경험한 강인권 두산 배터리코치는 “두 번 모두 8회 2사 후부터는 내가 투수보다 더 떨렸다. 상대 타자들도 어떻게든 안타를 쳐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지면서 헛스윙이 많이 나와서 볼 배합을 변화구 위주로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번에 마야의 공을 받은 두산 양의지도 “솔직히 8회부터 노히트라는 사실을 잊으려고 전광판도 안 쳐다봤다. 그러다가 9회 선두타자가 볼넷으로 나가면서 ‘이러다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마음을 고쳐먹었다”며 “정말 포스트시즌보다 더 떨렸다”고 토로했다. 물론 때로는 원통할 때도 있다. 강인권 코치는 정민철의 노히트노런 때 8회 패스트볼로 통한의 스트라이크아웃낫아웃을 허용하면서 칭찬 대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여전히 민철이에게 미안하다. 관중들의 야유 때문에 경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밖에 못 나가다가 민철이의 차를 타고 겨우 구장을 빠져나왔다”고 회상했을 정도다. 그러나 정민철은 “강인권 탓에 퍼펙트게임이 깨진 게 아니라, 강인권 덕에 노히트노런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이 아마도 정답일 것이다. [은] |
퍼펙트게임은 언제 나올까 ‘LA몬스터’ 류현진 작년 7회까지 퍼펙트 아까비~ 그래서일까. 한국 프로야구 34년 역사에서 아직 퍼펙트게임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1군이 아닌 2군에서 롯데 이용훈(2011년 9월 17일 달성)이 딱 한 번 기록한 게 전부다. 우리보다 역사가 훨씬 긴 다른 리그에서도 퍼펙트게임은 아주 희귀하다. 1936년 출범한 일본 프로야구에서 78년간 15번, 1876년에 시작된 메이저리그에서 138년간 23번이 각각 나왔을 정도다. 산술적으로는 일본이 평균 5.2년, 메이저리그가 평균 6년에 한 번씩 나왔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물론 산술적인 수치일 뿐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퍼펙트게임 기록만 봐도 그렇다. 일본은 1994년 5월 18일 요미우리의 마키하라 히로미가 달성한 이후 21년째 감감 무소식이지만, 메이저리그는 불과 3년 전인 2012년 8월 15일 시애틀 소속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퍼펙트게임 소식을 전해왔다. 사실 LA 다저스 류현진도 아직 나오지 않은 메이저리그 24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 류현진은 지난해 5월 27일 신시내티전에 선발등판해 7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갔지만, 8회 선두타자 토드 프레이저에게 좌월 2루타를 내주면서 대기록이 무산됐다. 일본인 투수인 텍사스 다르빗슈 유 역시 류현진보다 1년 앞선 2013년 4월 3일 휴스턴전에서 9회 2사까지 26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하면서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가 마르빈 곤살레스에게 통한의 중전 안타를 맞고 기록을 채 완성하지 못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퍼펙트게임을 해낸 아시아 출신 투수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올해 KIA 유니폼을 입은 새 외국인투수 필립 험버가 메이저리그 퍼펙트게임 달성자라는 점이다. 험버는 2012년 4월 2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시애틀과의 경기에서 빅리그 21번째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그 경기가 험버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스포트라이트였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