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유골밭 ‘이보다 더 충격적일 수 없다’
[5탄] 핑딩산 대학살 현장에서
지난 4월 6일, <일요신문> 취재진은 랴오닝성 푸순에 다다랐다. 푸순은 세계 최대 규모의 노천탄광이 위치한 유서 깊은 산업도시다. 푸순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탄광은 12세기부터 개발됐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취재진이 탄광을 찾았을 때, 연무에서 비롯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불구불 산업 철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규모의 탄광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뤘다.
80여년 전 일제에 의해 대학살이 벌어진 핑딩산 기념관엔 유골들이 발굴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500㎡ 유골밭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작은 사진은 어린아이를 감싸 안은 채 죽음을 맞이한 모자의 유골.
이 푸순의 탄광은 피로 얼룩진 역사를 담고 있다. 동북아시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이 거대 탄광은 100년 전 열강들에게 있어선 매력적인 침략의 대상일 뿐이었다. 푸순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가 강점한 곳이었다. 그 이전엔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한 땅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푸순은 너무나 가슴 아픈 기억을 안고 있다. 1932년 9월 16일, 푸순의 탄광 근처에 자리 잡은 핑딩산(平頂山)에선 일제에 의한 피의 향연이 펼쳐졌다. 일제는 당시 탄광 일을 밥줄로 삼고 있었던 부락의 민간인 3000명을 인근 핑딩산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들을 총칼로 찌르고 쏴 죽였다. 대학살의 명목은 게릴라들에 대한 토벌 작전이었다.
당시 이를 진두지휘했던 이는 혼조 시게루 관동군 총사령관과 도이하라 겐지 대장이었다. 시게루 사령관은 한인애국단 소속 열사들의 주요 암살 대상이었다. 그만큼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전범재판소에 넘겨지기 직전, 스스로 할복자살을 택했을 정도로 독한 성격이기도 했다. 겐지 대장은 당시 이 사건을 포함한 만주사변의 만행 때문에 전범재판소에 넘겨져 1948년 사형에 처해진다.
희생자 대부분은 게릴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순수 민간인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여성과 노인, 심지어 임산부와 갓난아이까지 포함됐다. 중국인은 물론 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 20세기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제의 반인륜적 만행의 표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현재 대학살이 벌어진 핑딩산은 중국 정부에 의해 기념관으로 조성됐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대학살이 벌어진 장소에서 발굴된 유골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현장을 찾은 기자는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80년이 더 된 일이었지만, 그 때의 아픔이 바로 피부에 와 닿았다.
발굴된 피해자들의 ‘유골밭’은 어림잡아 500㎡ 넓이였다. 그 전체는 보호를 위해 거대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유골밭에는 어린아이를 감싸 안은 채 죽음을 맞이한 모자는 물론 당시의 고통이 전해지듯 죽음 직전 입을 벌린 채 운명한 이들도 곳곳에서 눈이 띄었다. 여기에 태중에 아이를 가진 채 희생당한 것으로 보이는 임산부도 볼 수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충격적이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이와 더불어 기념관 곳곳에는 당시 일본 관동군의 작전 계획 및 만행의 과정을 묘사한 밀랍인형들과 조각상들이 배치돼 있었다.
천만 다행인 점은 묻혀버릴 수 있었던 이 사건이 곧 에드워드 헌터라는 미국 출신 언론인에 의해 알려졌다는 것이다. 헌터의 고발로 인해 당시 충격적인 사건은 서방세계에 그대로 알려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일본 역시 당시 만행에 대해 희생자의 규모에 이견이 있을 뿐 부인하진 못하고 있다.
일본 관동군의 핑딩산 만행을 묘사한 밀랍인형들.
이번 대장정을 함께 한 조선족 출신 향토사학자 전정혁 선생은 “핑딩산 대학살은 단순히 중국인들만의 희생으로 바라볼 문제가 아니다”며 “이는 중국을 넘어 같은 아픔을 겪은 동북아시아인들 전체의 문제이며 함께 공유해 나가야 할 역사다. 오늘 핑딩산 등에서 목격한 일제의 만행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아시아에 깊이 새겨진 당시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하고 있지만, 최근 일본 아베 정권의 움직임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지난 4월 26일, 6박 8일의 일정으로 미국을 다녀 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미국과 이른바 신 밀월관계를 형성하며 자신감을 얻은 모양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없고 정당성만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에 다시금 군국주의로 향할 수 있는 개헌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희망적인 사실은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전 세계의 반발도 만만찮다는 점이다. 지난 5월 5일, 미국와 유럽 등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역사학자 187명은 일본 아베 정권을 향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엔 일본군 강제동원 및 위안부 과거사 왜곡 중단 요구 등이 담겨 있다. 성명에 동참한 이들 중에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히로히토 평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허버트 빅스 빙엄턴대 교수 등 석학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일요신문> 취재진이 기념관을 나올 때 출구에 세워진 한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이번 ‘신흥무관학교와 잊힌 영웅들 2500㎞ 대장정’을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것 같았다.
‘역사는 거울이며 교과서다(History is a mirror, and also philosophical textbook).’
중국 랴오닝=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푸순 전범수용소 조선인 소장 ‘김원’ 눈길 마지막 황제 ‘푸이’ 자립에 큰 힘 푸순 전범수용소 소장이었던 조선인 김원(위)과 수용소 내부 전범기념비. 석방된 전범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지난 3월, 독일 메르켈 총리가 정상회담 자리에서 일본 아베 총리에 건넨 충고다. 미르켈 총리의 말처럼, 결국 아시아 모두가 지향해야 하는 길의 종착지는 올바른 과정을 통한 ‘화해’일 것이다. <일요신문> 취재진은 지난 4월 6일 공식적인 여정을 마무리하고 잠시 푸순 전범수용소를 들렀다. 푸순 전범수용소는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중국에 남은 전범 928명을 수용 및 개조한 역사적인 장소다. 기자는 이곳에서 화해라는 희망의 단초를 엿볼 수 있었다. 수용소는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수용소 오른편엔 현재 교도소로 사용 중인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수인들의 시설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수용소 내부에는 당시 전범들이 묵었던 생활관과 식당, 세면시설, 실습실, 야외 강당, 의무실, 텃밭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벌써 반세기 전 설비한 시설이라는 것은 감안한다면 갖출 것은 다 갖춘 곳이었다. 928명의 전범들은 이곳에서 중국 정부에 의해 그야말로 혹독한 개조 작업을 거쳤다. 전범들은 수감기간 동안 매일같이 반성문을 썼으며 비판대회를 통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자료들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개조 작업을 거친 전범들은 그 죗값과 개조 정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석방돼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6년 전범 300명을 시작으로 1964년 3월까지 수감 도중 사망한 5명을 제외하곤 모두 석방됐다. 수용소 중앙에는 당시 석방된 전범들이 귀국 후 성금을 모아 세운 ‘전범기념비’가, 수용소 외벽 곳곳에는 이들이 반성의 의미로 중국 정부에 보낸 서신들이 전시돼 있었다. 얼마나 중국 정부의 개조작업이 혹독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이곳에선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가 서려있었다. 취재진은 수용소를 돌아보는 와중에 뜻밖의 인물과 마주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로 유명해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일제가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 푸이였다. 이곳엔 당시 푸이가 묵었던 생활관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생활관 안에는 손수 바느질을 하고 있는 푸이의 밀랍인형이 설치돼 있었다. 푸이는 일제 패망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고자 했지만, 당시 소련군에 의해 붙잡혀 이곳 전범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는 1956년 모범수로 석방되기 이전 이곳에서 10년을 보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앞서의 전범들과 푸이를 관리한 당시 수용소의 소장이 조선인이었다는 것. 수용소 전시관 한 곳에 ‘김원’이라고 하는 조선인 소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김원은 1926년 경북 봉화에서 출생, 여섯 살 되던 해에 가족들을 따라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으로 이주했다. 1946년 군에 입대한 김원은 1948년 이곳 전범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돼 928명의 전범들을 책임지게 된다. 당시 수용소엔 김원 이외에 두 명의 조선인 부소장이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현재 수용소 관리직원에 따르면, 당시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한 조선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일본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관리자로 발탁될 수 있었다고 한다. 2004년 사망한 김원은 무엇보다 당시 수감된 전범들에 단순한 개조작업을 넘어 취미생활을 권하고 때때로 연회도 여는 등 인도주의적 대우로 훗날 전범들과 중국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김원은 당시 푸이와의 인연으로 영화 <마지막 황제>에 직접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자신의 신발 끈조차 묶지 못하는 푸이를 향해 “독립심을 가지라”고 윽박지르는 수용소장이 바로 조선인 김원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실제 푸이가 석방 후 식물원의 정원사로 자립하게 된 데에는 김원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