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은 ‘직함’이 대관식행 ‘보조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과 모친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이 5월 21일 잠실 야구장에서 삼성과 두산의 야구 경기를 관람했다. 7회 삼성 구자욱이 투런 홈런을 치자 기뻐하는 모습. 사진제공=삼성라이온즈
삼성생명은 이건희 회장 개인이 1대주주(20.76%)인 유일한 회사다.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제일모직은 2대주주(19.34%)다. 3대와 4대주주가 각각 삼성문화재단(4.68%), 삼성생명공익재단(2.18%)이다. 이 부회장이 두 재단을 대표하게 되면 이 회장 지분이 아니더라도 제일모직이 가진 지분과 함께 삼성생명의 실질적인 최대주주가 될 수 있다.
이 부회장에게 삼성생명은 후계구도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룹의 핵심은 삼성전자이지만,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이 회장이 아니라 삼성생명이다. 이 회장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3.38%)을 물려받는 것보다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의결권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후계구도는 대기업 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이 부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삼성전자 최대주주인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이다. 삼성의 두 재단이 가진 지분 6.86%를 확보할 수 있다면 최악의 경우 이 회장이 가진 삼성생명 지분을 상속이나 증여받지 않고도 제일모직과 합해 가장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두 재단에 대한 지배력 확보는 세금 및 여론 부담 등으로 상속. 증여가 지연되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에도 그룹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는 ‘선수’인 셈이다.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은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하는 데도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이 부회장이 회장이 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삼성전자에 대한 의미 있는 지분을 확보하거나 삼성전자를 경영할 만한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내놓은 갤럭시S6의 반응이 기존 모델에 비해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다. 야심차게 추진 중인 사업구조 재편은 아직 진행 중일 뿐이다. 바이오 등 신사업도 성과가 나오기까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계속 삼성그룹 수장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다. 일단 삼성전자 최대주주사의 지배자라는 자격을 갖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삼성생명 자체에서 경영능력을 과시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생명은 아시아 중상위권 이상의 보험사 인수를 검토하고, 자산운용에서는 선진국의 글로벌 보험사를 인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회장 취임 시기는 언제일까. 재계 일각에서는 최근 이 회장의 발병 1주년에 즈음해 이 부회장을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은 조금 이르다’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삼성으로서는 당장 이 부회장의 회장 취임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지배구조를 갖추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과 그 다음 대까지 유효한 지배구조를 갖추는 일이다.
익명의 한 주식형 펀드 매니저는 “이건희 회장의 경우 그룹을 크게 성장시키면서 소유한 주식수와 큰 상관없이 안팎에서 최고경영자로 인정받았다. 이 부회장이 당장 이 회장 같은 카리스마를 가지기는 어렵다. 결국 확실한 지배구조를 통해 그룹 경영권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시장에서는 현재 정부와 정치권에서 논의 중인 중간금융지주회사법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현행법으로는 비금융회사인 제일모직이 지주회사가 되면 금융회사인 삼성생명을 자회사로 둘 수 없다. 제일모직이 삼성생명을 지배하지 못하면 삼성전자도 지배할 수 없다. 그런데 중간금융지주가 허용돼 제일모직이 지주사로서 삼성생명을 지배할 수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일모직을 지주회사로 전환하고,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을 인적분할 방식으로 분리, 인적분할된 회사가 제일모직과 합병하면 제일모직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직접 지배하고, 삼성생명과 삼성전자가 금융업 및 제조업을 지배하는 중간지주사가 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에 대한 논란도 없앨 수 있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이 전체 운용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은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삼성생명의 총자산은 223조 원인데, 보험업법 상 계열사 주식보유 한도는 총자산의 3%다. 삼성전자 지분 7.21%의 시장가치는 15조 3075억 원으로 총자산의 6.86%에 달한다. 그런데 유독 보험업법에서만은 시가가 아닌 취득원가로 계열사 주식을 계산하도록 허용하고 있어서다. 이 덕분에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가치를 약 4조 원으로 평가할 수 있다. 총자산의 2%도 안 되는 수치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시장의 원칙은 시가평가다. 그런데 유독 보험업법에서만 취득가로 반영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삼성 측은 기업가치가 늘어난 데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항변하지만, 삼성전자 지분 취득에는 당시 보험계약자의 돈이 상당부분 투입됐다. 삼성전자 지배를 위해 보유한 주식이라면 계약자 자산이 아닌 회사 고유자산으로만 매입했어야 앞뒤가 맞는다. 지금 당장은 이 논의가 수면 아래에 있지만, 삼성지배구조 문제가 이슈가 되면 언제든 다시 논란이 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좌절된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패션, 레저, 식음료 등으로 세 남매가 ‘한지붕 세 가족’인 제일모직의 사업구조 재편 등도 새로운 지배구조를 위해 풀어야 할 숙제다. 결국 중간금융지주사의 허용 여부와 함께 새로운 지배구조가 완성되는 시기, 또는 이재용 부회장이 걸출한 경영성과를 거두고 이를 시장에서도 인정하는 때가 ‘삼성전자 회장’ 취임시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