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수석, 그거 꼭 있어야 하나”
지난 2004년 <서울신문>은 사설을 통해 지난 6공화국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인사가 사석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이 인사는 “사무실 금고가 현금·수표로 그득하게 채워져 있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고 전했다. 이 당시 정무수석은 정치권에 적절히 돈을 나눠주면서 대통령의 통치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컨트롤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정무수석은 ‘왕수석’이라 불리며 여타 수석들과 급을 달리했다.
참여정부 시절 정무 기능을 겸비한 정책실장을 역임했던 김병준 교수는 “정무수석을 따로 둘 것 없이 지금의 정책 라인들이 정무기능을 하면서 가는 게 맞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노 전 대통령은 정무수석 폐지 약 10개월 뒤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정무수석의 역할과 기능은 누가 맡아서 수행할 것인가’ 하는 논란에 대해 정무 업무는 사안의 성격에 맞는 인사가 업무를 처리하면 된다고 정리했다. 이는 현 정권의 정무수석 역할에 대한 시각과 큰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정무 업무는 어느 한 수석실에서 전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부서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과 관련해 정무적 판단을 하는 게 기본”이라고 밝혔다. 이어 노 대통령은 “(정무수석의 기능은) 이병완 전 홍보수석 혼자 한 게 아니라 김병준 정책실장과 김영주 경제정책수석, 정무기획비서관 등 복수의 관련인사가 해왔다”고 덧붙였다.
기자는 당시 청와대에서 정무 기능을 겸비한 정책실장을 역임했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지난 11일 동작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병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신임을 굳건하게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5년 내내 참여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당시의 청와대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고 있다. 그에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정무수석 인선 갈등과 역할 등에 대해 물었다.
─참여정부에서는 정무수석을 없애는 실험을 했다. 배경이 무엇이었나.
“당시 정무수석이란 게 당과 오가는 민원 중개자 역할 정도밖에 안 됐다. 정무수석이 당하고 이야기하면 당의 미래나 국정운영이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정무수석을 두니까 ‘교부세를 좀 달라’ ‘누구 자리를 하나 달라’는 등 민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갖고 오며 당청간 민원 메신저 역할이 거의 전부였다. 노 전 대통령은 민원 해결 안 해준다고 했지만 주는데 안 받아 올 수 있나? 쪽지로 다 받아서 갖고 오지.”
─그 만큼 많은 민원이 들어왔나.
“오히려 당의 고위직 같으면 민원 같은 건 자기 스스로 해결하거나 장관한테 직접 이야기하거나 하겠지만 (당시 열린우리당은) 초선이 난무하니까…. 당의 발전이나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나오다 쪼가리(민원쪽지) 하나 내밀지, 그렇다고 여의도 하루 종일 쫓아다닌다고 해도 당의 무슨 입장이 있어야 조율도 하지. 정무수석이 기능도 없이 가져오는 게 쪼가리만 가져온다고 해서 폐지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다.”
2004년 6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신임 김병준 정책실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럼 정무수석이란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당시 상황이 문제였던 건가.
“정무수석이란 자리도 문제지만 당이 더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 열린우리당도 그렇고 정치권이란 게 희한해서 창구도 없고 입장도 없다. 당은 매일 소통하자고 그러는데 누구하고 소통하자고 그러는지 내가 정책실장 할 때 제일 답답했던 게 그거다. 원내대표나 정책의장하고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도 ‘그런 일 없다’, ‘금시초문이다’라고 해도 어김없이 10분 뒤에 여당 소속 의원들 나타나서 기자회견 연다. 당시에는 정책정당이 아니다 보니까 입장이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의 민주당 같으면 조세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나올 거 같다, 누구에게 이야기하면 될 것 같다는 게 예측이 된다.”
─예전에 6공화국 정무수석은 ‘정말 원 없이 돈을 써봤네’라고 했다고 한다.
“짐작이니까 안 그랬을 수도 있지만 과거 정무수석은 돈이 있으니까 당 사람들을 만나서 위무하고 술도 마시고 용돈도 주고 돈도 좀 주고 카드 내밀고 이걸 했을 것 같다. 그런데 DJ정부 이후 특히 참여정부는 그런 정부가 아니다. 정무수석이 무슨 돈으로 술을 살 수 있나. 한 달에 판공비가 몇 백만 원 단위다. 정무수석이 밥도 맘대로 못 사줘, 용돈 줄 돈도 없어, 후원금 갖다 줄 돈도 없다. 아무것도 없이 맨입에 가서 때워야 하는데 통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갖고 오는 것은 민원쪽지다. 그렇다고 당은 이쪽에 이야기해봐야 내일 저쪽이 터지고 저쪽에 이야기하면 오늘 이쪽이 터지고 무슨 기능을 할 수 있겠나. 아무 기능도 못한다. 오로지 남는 것은 민원쪽지밖에 없다. 그러니까 정무수석을 없애버리고 각 부처 실무자가 정무 기능을 담당하게 했다. 정책실의 경우에는 입법 관련한 회의나 모임을 담당했다.”
“정무수석의 역할은 앞으로 당정협의 입법중심, 정책중심의 정무 협의를 해야 한다. 즉, 정무수석을 따로 둘 것 없이 지금의 정책 라인들이 정무기능을 하면서 그냥 가는 게 맞다고 본다. 지금 정무수석이 큰 역할이 없다. 실제 역할을 못한다. 기능적으로는 참여정부가 했던 게 맞다고 본다. 모든 사람들이 정무 기능을 다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나름의 역할이 있으니까 그 역할을 가지고 당정 협의에 참여하면 된다. 정무수석을 두더라도 해당 정책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당에 가서 정책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입법요구나 입법 설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애초에 정무수석을 당과의 민원창구 때문에 뒀는데 어차피 민원을 해결할 수 없는 현시점에서 각자 자기가 맡은 기능을 하면 된다고 본다. 청와대 정책담당, 홍보 담당이 필요한 일 있을 때 당정협의하는 방식으로 그때 그때 해당 분야 전문가가 나가면 된다.”
─그렇다면 참여정부가 정무수석을 없앴을 때는 문제없이 잘 돌아갔나.
“문제가 있었다.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다. 정무수석이 없어지니까 민원 넣을 곳까지 없어졌으니 욕하는 거다. 노 대통령은 죽어도 민원 들어주지 말라고 한다. 당은 소통 안 된다고 욕하는데 그 말이 뭔가. 자기 부탁을 청와대에 좀 이야기하고 싶거나 인사라도 부탁하고 싶지만 창구가 없어 그게 답답한 것이다.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국회의원이 입법하려고 하는데 청와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그게 왜 창구가 없겠나. 각 분야 담당 수석들이 다 있다.”
─구체적으로 정무수석을 없앤 후에는 어떤 식으로 담당자가 접촉했나.
“1차적으로 각 부처 장관들이나 차관들이 국회의원 만나서 법안을 두고 설득하고 논리를 전달하고 온다. 내가 청와대 있을 때는 정책실장이 각 부처의 장관, 차관이 누구와 접촉했고 어느 정도 설득의 효과가 있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 청와대에서 장관에게 가이드라인을 정해준다. 청와대가 각 부처에 이 선은 절대 우리가 밀리면 안 되는 선, 여기까지는 양보해도 되는 선 등을 그어준다. 그러면 장관들이 일하기가 굉장히 편해진다. 그렇게 각 담당자가 정무 기능을 담당하면 된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