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지 놓고 분쟁 하늘서도 편치 못해
애나 니콜 스미스는 사망 3주나 지나서야 바하마에 있는 아들 대니얼의 묘지 옆에 묻혔다. 원 안은 스미스 묘비. 로이터/뉴시스
2006년 9월 7일 딸 대니얼린을 낳은 애나 니콜 스미스는 3일 후인 9월 10일에 아들 대니얼을 잃는다. 이후 대니얼린의 진짜 아버지가 누군지를 놓고 시비가 이어졌고,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스미스는 당시 연인이었으며 과거 자신의 변호사였던 하워드 스턴과 결혼식을 올린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18일 후인 2006년 9월 28일, 그들은 바하마 해변에서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렸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장례식에서 자신도 아들과 함께하겠다고 관 속으로 들어가려 할 정도로 슬픔에 빠졌던 그녀가 그토록 빠른 시간 안에 고통에서 벗어나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스턴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니얼린에 대한 양육권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스미스에게 황급한 결혼식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간 아들 대니얼의 망령이 어머니의 행동에 섭섭함을 느꼈던 걸까? 스미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매일 꿈에 대니얼이 나타나, 무덤 저편에서 자신에게 손짓을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떨 땐 대니얼이 아직 연옥에 갇혀 있으며, 길을 잃은 채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있다고 슬퍼하기도 했다. 자살 시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수영장에 엎드린 채 둥둥 떠 있는 스미스를 스턴이 구해낸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점점 약물에 중독되어 갔다. 마약은 아니었다. 모두 처방전을 통해 구할 수 있는 ‘합법적’ 약물이었다. 그 양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커다란 테이블스푼으로 세 숟갈 정도 되는 양을 매일 복용했다. 하지만 편안한 내면은 찾아오지 않았다. 2006년에 그녀는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 다녔는데 당시 정신 치료를 맡았던 내털리 마울리 박사의 소견서엔 ‘경계성 인격 장애’라는 단어가 있으며, 이것은 충동적이고 우울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던 당시의 스미스를 설명한다.
2007년 2월 8일 애나 니콜 스미스는 플로리다의 세미놀 하드록 호텔의 607호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보디가드였던 모리스 브라이트하우프트와 그의 아내인 타스마는 숙련된 응급 처치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앰뷸런스가 오기까지 15분 동안 쉬지 않고 심폐 소생술을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새벽 2시 10분에 메모리얼 리저널 병원으로 이송된 스미스는 2시 49분에 사망한 것으로 최종 진단된다. 당시 911 통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드록 호텔 607호실에 도움이 필요하다. 백인 여성이며, 숨이 멈추었고 반응이 없는 상태다. 그녀의 이름은… 애나 니콜 스미스다.”
검시관 조슈아 퍼퍼 박사의 꼼꼼한 조사가 이뤄졌다. 사진은 약물 과용이었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수면제에 포함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성분. 1832년에 처음 합성된 물질로, 이것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최면제가 등장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선 알코올과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섞은 마취제인 ‘미키 핀’(Mickey Finn)이라는 것이 유행할 정도. 적당한 양으로 적절한 방식을 통해 사용되면 수면 장애를 치료하는 좋은 약이 되지만, 조금만 양이 늘어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다른 물질과 혼합되면 치명적으로 변하는 물질이었다.
스미스의 몸속에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는 클로노핀, 아티반, 세락스, 발륨 등과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그 결과는 비극적 죽음이었다. 아들인 대니얼이 몰래 엄마의 선반에 있는 메타돈을 먹은 결과 조용히 죽어갔다면, 내성 때문에 엄청난 양의 약을 먹어야 했던 스미스는 어느 호텔 방에서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하는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그런데 처방전이 문제가 되었다. 애나 니콜 스미스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통해 처방전을 받아 약을 복용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남편인 하워드 스턴이었다. 그녀의 혈액에서 발견된 11개의 약물 성분 중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포함해 8개의 성분은 스턴의 처방전에 의한 것이었다. 처방전의 다른 이름은 친구인 알렉스 카츠 그리고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틴 엘레인 에로셰비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처방전은 닥터 에로셰비치가 쓴 것이었다. 그녀가 죽은 지 3년 후인 2010년 10월, 남편인 스턴과 의사인 에로셰비치가 니콜 스미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판사는 기각했다. 여기에 많은 팬들과 매체들은 분노를 표시했고, 2012년에 두 사람을 법정에 세우려는 노력이 다시 이어졌으나 뚜렷한 결과를 얻진 못했다.
한편 2007년 3월 2일에 애나 니콜 스미스의 장례식이 있었다. 세상을 떠난 지 3주나 지난 시점이었고, 그녀의 시체는 상당 부분 부패되어 있었다. 이렇게 미뤄진 건 매장지를 놓고 법정 분쟁이 있었기 때문.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이 사는 텍사스를 원했지만, 남편인 스턴은 아들 대니얼이 묻힌 바하마에 그녀가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그녀가 아들 곁에 묻힐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렇게 애나 니콜 스미스의 40년 인생은 막을 내렸고, 삶의 상당 기간을 소송과 재판 속에 지냈던 그녀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판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유산 상속 관련 소송은 진행 중이었고, 딸 대니얼린을 둘러싼 양육권 분쟁도 계속되고 있었다.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셀러브리티 애나 니콜 스미스. 4주기인 2011년 2월엔, 그녀의 삶을 담은 <애나 니콜>이라는 오페라가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