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은 ‘38’ 광땡, 김용희는 ‘88’하게
#선수들의 등번호 사연
‘21’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오랫동안 ‘불사조’ OB(현 두산) 박철순을 상징하는 번호였다. 그러나 지금은 역대 최고 소방수의 존재감이 담겨 있다. 한신 오승환이 삼성 시절 꾸준히 달던 번호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인 선수들이 그렇듯 오승환도 입단 당시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그나마 예전부터 달던 번호랑 가장 비슷해 이 번호를 골랐다”고 했다. 학창시절에는 ‘1’이 두 번 반복되는 11번이 오승환의 차지였다. 그러나 2005년 입단 당시에는 선배 투수 김덕윤이 11번을 꿰차고 있는 상황이라 오승환이 그 번호의 권리를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2005년 21번과 함께 출발한 오승환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한국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거듭났다. 이후 김덕윤이 두산으로 트레이드되면서 오승환에게도 11번을 다시 얻을 기회가 생겼지만, 그는 이미 난공불락의 상징이 된 21번을 고수했다. 한때 휴대전화 번호의 가장 마지막 두 자리에 ‘21’을 집어넣을 정도로 애착도 보였다. 오승환은 일본에 진출하면서 21번이 아닌 22번을 받았는데, 한신에서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군림하던 후지카와 규지가 달았던 번호다. 그리고 그는 22번과 함께 또 다른 철벽의 역사를 구축해가고 있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한화 박정진은 입단 후 여러 개의 번호를 거치다 지금 달고 있는 17번에 안착했다. 방출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가 가까스로 구제됐던 2010시즌을 앞두고 가장 친한 친구의 권유로 17번으로 바꿨다. 지금은 야구를 그만둔 그 친구가 대학 시절에 쓰던 등번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친구의 숫자를 등에 달게 된 박정진은 그 후 최강 셋업맨으로 새 야구 인생을 열었다. 이제 그는 “17번은 가장 애착이 가는 번호”라고 말한다.
#감독들의 등번호 사연
감독들의 등번호는 선수들의 백넘버보다 덜 눈에 띈다. 선수들은 숫자가 큼직하게 찍힌 유니폼을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지만, 감독은 더그아웃 감독석에 묵직하게 앉아 자신의 등번호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들에게도 등번호에 얽힌 사연은 있다.
선수~코치~감독을 거치는 동안 한 번도 삼성을 떠나지 않은 류중일 감독은 최근 75번을 달게 된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류 감독은 “처음엔 60번대 번호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70번대는 남는 게 없었고, 80번대는 체격이 큰 코치들이 많이 쓰더라”며 “75번을 달았던 다른 코치가 팀을 떠나면서 그 번호를 받았다”고 밝혔다. 보통 코치에서 감독으로 새롭게 출발할 때는 새 등번호로 다시 시작하고 싶기 마련. 그러나 류 감독은 “모든 소지품, 심지어 속옷까지 다 ‘75’가 새겨져 있는데 번호를 바꾸면 전부 교체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내가 변화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이사도 잘 안 간다”고 귀띔했다. ‘변화’를 꺼리는 류 감독의 부임 이후 삼성은 줄곧 우승만 하고 있다.
코치 시절부터 쓰던 등번호를 그대로 쓰는 감독은 2명 더 있다. 선수 시절 5번을 달았던 넥센 염경엽 감독은 현대에서 은퇴 후 코치가 되면서 ‘5’가 들어간 75번을 선택했다. 이 번호는 LG 시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넥센으로 옮기면서 85번으로 바꾼 뒤 지휘봉까지 잡게 됐다. 염 감독은 “이 번호를 달면서 감독이 됐으니 내게는 좋은 번호인 것 같다”며 번호를 유지했다. 롯데 이종운 감독도 2군 코치로 오면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99번을 받았는데, 감독으로 임명된 뒤에도 그 번호를 고수했다. “선수들 번호도 꽉 차고, 1~3군 코치들 번호도 꽉 찼는데, 내가 번호를 바꾸면 여러 명이 번호를 연쇄적으로 바꿔야 하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는 배려에서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처음에 72번을 원했지만, 다른 코치가 달았다는 얘기에 “그럼 주인 없는 번호를 달라”고 자청한 케이스. 때마침 김 감독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88번이 남아있어 자연스럽게 그 번호의 주인이 됐다.
한화 김성근 감독은 38번을 달고 있다. ‘38’은 화투에서 ‘광땡’을 뜻하는 행운의 숫자다. SK 김용희 감독(연합뉴스)은 10여 년간 현장을 떠났다가 만 60세에 다시 프로야구단 지휘봉을 잡으면서 “팔팔한 야구를 하고 싶다”는 뜻에서 88번을 선택했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한화 김성근 감독은 2007년 SK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38번을 달고 있다. ‘38’은 화투에서 ‘광땡’을 뜻하는 행운의 숫자다. NC 김경문 감독의 74번에는 인생과 야구에 모두 ‘행운(7)’과 ‘불운(4)’이 공존한다는 진리가 담겨 있다. 김경문 감독이 두산 시절부터 지금까지 11년째 74번을 고수하는 이유다. SK 김용희 감독은 10여 년간 현장을 떠났다가 만 60세의 나이로 다시 프로야구단 지휘봉을 잡으면서 “팔팔한 야구를 하고 싶다”는 뜻에서 88번을 선택했다. LG 양상문 감독은 지난해 부임하면서 79번을 유니폼에 달았다. 양 감독은 고려대 79학번이다. LG 감독 시절 자신의 프로 데뷔 연도인 91번을 등에 새겼던 KIA 김기태 감독은 올해 새 팀으로 오면서 77번을 골랐다. “행운을 두 배로 받겠다”는 의지다. KT 조범현 감독은 KIA 사령탑 시절부터 달았던 70번을 고수하고 있다. 조 감독은 “KIA 감독으로 취임할 때 당시 간베 도시오 투수코치가 ‘일본에서 70번이 아주 좋은 번호’라며 추천해줬다”고 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류현진 등번호에 담긴 사연 한화서 99는 ‘암묵적 결번’ 99번의 시작은 아주 미약했다. 동산고 시절 21번을 달았던 류현진은 2006년 한화에 입단하면서 새 등번호 15번을 받아 들었다. 당시 일본에서 뛰고 있던 대선배 구대성이 한화에 남겨 놓고 간 번호. 한화에 입단하는 왼손 투수라면 누구나 탐낼 만큼 귀한 번호였다. 구단은 류현진이 구대성의 계보를 잇는 좌완으로 성장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아껴뒀던 번호를 선사했다. 그러나 새 시즌의 개막을 한 달 앞둔 3월, 구대성이 한화로 돌아왔다. 신인 류현진은 당연히 15번이 찍힌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이미 모든 선수가 등번호 선택을 마친 상황. 남아 있는 번호가 몇 개 없었다. 고심하던 류현진의 눈에 99번이 들어왔다. 사실 99번은 고(故) 조성민이 ‘내 인생의 마지막은 야구’라는 의미로 2005년까지 갖고 있던 번호였다. 그러다 그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등번호를 1번으로 바꾸면서 빈 번호가 됐다. 그렇게 남은 99번이 결국 덩치 큰 신인 류현진의 차지가 됐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그 후로 ‘99번’ 류현진의 역사가 시작됐다. 류현진은 데뷔 첫 해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1위를 석권하면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사상 최초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한화에서 뛴 7년 동안 통산 98승(시즌 평균 14승)을 올리며 절대 에이스로 군림했다. 그 사이 99번은 한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 전체에서 류현진을 상징하는 등번호가 됐다. 류현진이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던 수많은 국제대회 유니폼은 물론, 2012시즌을 끝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현진의 LA 다저스 유니폼 등에도 여전히 ‘99’라는 숫자가 붙어 있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 류현진이 99번의 역사를 메이저리그에서도 이어갔다. 오히려 이제 한화에서는 ‘99번’이 사라졌다. 사실 올해 한화 경기에서는 다른 구단에서 쉽게 보기 힘든 세 자릿수 등번호 선수들이 여럿 뛰었다. 117번의 포수 지성준, 118번의 2루수 정유철, 121번의 투수 김병근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육상선수 출신. 신인들은 번호 앞에 0자를 붙여서 기존에 같은 번호를 쓰는 선수들과 구분하는 방식을 쓴다. 선수 수에 비해 남은 등번호가 모자라서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번호가 부족해도 절대 손 댈 수 없는 번호가 하나 있다. 바로 류현진의 99번이다. 한화는 이미 3개의 영구결번을 보유하고 있다. 역대 최다승 투수 송진우의 21번, 역대 우완 최다승 투수 정민철의 23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상징인 홈런왕 장종훈의 35번이다. 그러나 99번 역시 한화에서 사실상의 결번으로 남아있다. 나중에 단 한 명의 선수가 돌아와서 다시 달아주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에서다. 한화의 한 관계자는 “류현진이 다저스로 떠난 뒤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하지만, 99번을 쓴 한화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며 “공식적인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는 사실상 아무도 쓸 수 없는 번호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아마 99번이라는 번호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선뜻 달고 싶다고 자청하는 선수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며 “류현진의 한화 복귀는 아직 먼 훗날의 얘기지만, 한화의 99번 선수가 다저스에서 뛰고 있다고 여기고 싶은 게 구단의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은] |
‘영구 결번’의 역사 ML ‘42’번은 신성불가침 영구결번은 은퇴하는 선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번호가 곧 선수의 이름인 단체스포츠에서, 자신의 또 다른 ‘이름’도 함께 은퇴시키고 그 자리를 영원히 비워 놓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구단이 레전드를 예우하고 기리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선수의 수도 많지 않다. 4월 15일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를 기리는 ‘재키 로빈슨 데이’다. 이날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2013년 당시 신시내티 레즈 추신수의 모습. AP/연합뉴스 메이저리그에서는 1939년 처음으로 영구결번 선수가 나왔다. 양키스는 2130연속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철마’ 루 게릭의 은퇴식과 함께 그의 등번호인 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후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200개에 육박하는 영구결번이 나왔다. 특히 42번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에서 모두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번호다. 1947년 최초의 흑인선수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재키 로빈슨(브루클린 다저스)을 기리기 위해 그의 데뷔 50주년인 1997년 메이저리그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일하게 42번을 달고 있던 양키스 마무리투수 마리아노 리베라에게만 한시적으로 42번을 허용했고, 리베라가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이제 42번은 진정한 불가침의 영역이 됐다. 양키스는 로빈슨의 42번과 별개로 ‘리베라의 42번’을 따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면서 역사상 최초의 소방수였던 리베라의 업적을 기념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보다 역사도 짧고 팀 수도 적은 한국에서는 총 12명의 영구결번 선수가 나왔다. 최초는 1986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故) 김영신(OB)의 54번이다. 이후 1996년 해태 선동열(18번), 1999년 LG 김용수(41번), 2002년 OB 박철순(21번), 2004년 삼성 이만수(22번), 2005년 한화 장종훈(35번), 2009년 한화 정민철(23번), 한화 송진우(21번), 2010년 삼성 양준혁(10번), 2011년 롯데 고(故) 최동원(11번), 2012년 KIA 이종범(7번), 2014년 SK 박경완(26번)이 차례로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12명 가운데 현역 시절 소속팀을 옮겼던 선수는 양준혁, 최동원, 박경완뿐. 이 가운데 양준혁은 데뷔와 은퇴를 모두 삼성에서 했다. 삼성은 이승엽이 은퇴하는 시점에 36번을 영구결번 지정하기로 이미 결정해놓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