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빌려줬을 뿐인데 “아 쪽팔려”
▲ 김상순(왼쪽), 전원주. | ||
“나는 점심식사 자리인 줄 알고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 씨가 공인인 나와의 친분을 이용해 최 씨로부터 돈을 뜯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나도 피해자다. 김 씨가 잠적하자 최 씨 측에서 얼굴이 알려진 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하는 것이다.”
중견 배우 김상순의 항변이다. 오랜 만에 들려온 중견 배우의 소식이 반가울 법도 한데 사기죄 피소라니 씁쓸할 따름이다. 김상순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다. 연예인의 경우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면 얼굴이 알려졌다는 이유로 모든 죄를 쓰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다만 이번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주장을 경찰이 받아들여 “죄질이 가볍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처럼 중견 연예인을 둘러싼 사기 사건은 끊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가장 흔한 사례는 연예인의 명의를 도용하거나 계약을 위반한 과장 광고들이다. 지난 해 연말에는 중견 배우 전원주가 한 결혼정보업체의 허위 과장 광고로 물의를 빚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광고 모델일 뿐인 전원주가 마치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대표인양 과장 광고를 해왔다고 한다. 후배 탤런트의 아버지를 통해 해당 업체 관계자를 알게 됐고 친분을 이유로 이름과 사진을 빌려줬을 뿐인데 일이 커지고 말았다. 더욱 심각한 경우는 사업체 자체가 사기를 목적으로 설립된 경우다. 지난 2003년엔 연기학원사업 분양광고 사건이 문제가 됐다. 해당 업체의 대표 등이 과장광고로 투자금을 모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는데 광고 모델이던 연예인 3명도 사기공범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것.
연예인이 과장 광고로 입건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연예인들은 “광고 모델을 했을 뿐 유사 수신이 뭔지도 모른다”면서 “연예인이 광고 모델을 하면서 광고 내용의 사실유무를 파악하고 위법성까지 확인해야 하느냐”고 항변했었다.
김상순의 경우처럼 연예인 지망생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 사건에 휘말리는 중견 연예인들도 많았다. 피해자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중견 연예인과의 친분을 활용한 것인데 다만 김상순처럼 돈이 오가는 자리에 동석해 입건된 사례는 흔치 않다. 심지어 지난 2006년 5·31 지방선거 당시 평택시에선 중견 연예인 14명이 연루된 불법 선거운동이 불거지기도 했다.
우선 연예인이 이런 사기 사건에 쉽게 휘말리는 이유는 그들이 제한된 공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 소재의 한 증권사 VIP 지점에서 근무 중인 한 PB는 “스포츠스타나 연예인은 같은 분야 외 사람들과 접촉이 드물다 보니 정보가 제한적”이라며 “반면 얼굴이 알려져 그들에게 다가가 허위 정보를 건네며 이용하려 드는 사기꾼에겐 쉽게 노출돼 있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중견 연예인을 노리는 사기꾼들은 어떻게 이들에게 접근할까. 이를 위해선 소개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필요하다. 연예인의 정년이 불투명한 것처럼 그들 주변에 있는 연예관계자들 역시 정년이 불투명하긴 매한가지. 매니저는 물론이고 방송 관계자들 역시 비슷한 처지다. 이들 역시 연예계에서의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 새로운 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이들에게 먼저 사기꾼들의 손길이 다가가는 것.
방송가에서 활동하며 친분이 두터운 전직 매니저나 방송관계자들이 먼저 이들을 소개해주고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고 지내다 뭔가 부탁을 받게 되는 중견 연예인들이 소개해준 이를 믿고 부탁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사기 사건이 발발하곤 하는 것.
중견 가수들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김 아무개 씨는 “예전에 잘나가던 매니저들이 중견 연예인들에게 다가와 선생님 선생님하며 누군가를 소개해주면 중견 연예인들은 그의 과거 모습만 생각하고 마음을 열게 된다”면서 “연예인들이 제한된 공간에서 사는 데다 의리도 두터운 편인데 이를 악용하는 이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