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했던 데뷔전이 예방주사 됐어요~”
LPGA 투어 첫해에 3승을 올린 김세영은 “올 시즌 성적에 대해 만족하지만 시즌을 마칠 때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겠다”면서 신인왕에 대한 욕심을 내비쳤다. 오른쪽은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바지를 입은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김세영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2부 투어를 뛰고 있을 때부터 미래에셋증권의 후원을 받았다. 프로가 아닌 2부 투어 여고생에게 대기업이 후원에 나섰다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인연이 어느새 8년을 넘어섰다. 기자가 블루마운틴CC를 찾은 날은 마침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과 김세영의 라운딩이 예정돼 있었다. 박 회장은 중국에서 LPGA 우승컵을 들고 귀국한 김세영을 진심으로 반겼고, <일요신문> 사진 기자 앞에서 기분 좋은 표정으로 김세영과 함께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박 회장과 라운딩을 마친 김세영의 인터뷰를 문답식으로 정리했다.
―곧 미국 샌디에이고로 출국한다고 들었다. 중국에서 대회를 마치고 잠깐 한국에 들어온 건가.
“딱 3일 쉬고 다시 출국하는 일정이다. 그렇다보니 이번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박현주) 회장님과의 라운딩은 그동안의 도움에 대한 감사 차원에서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 회장님은 선수가 피곤해 한다며 좀처럼 골프 치자는 얘길 하지 않으신다.”
―박현주 회장의 골프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회장님 실력이 굉장하다. 기업인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분이라 그런지 골프를 치는 시각이 남다르다. 같이 라운딩하다 보면 배울 점이 정말 많다. 성공하신 분들의 ‘키워드’를 갖고 계시는 것 같아서 골프보단 인생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박 회장이 해준 여러 가지 얘기 중에서 가장 공감됐던 내용이 무엇인가.
“‘20대 때에는 시간을 잘 써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체력 관리 잘해라’ 등이다. 깊이 공감하고 있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지난 4일 강원도 홍천 블루마운틴CC에서 김세영이 후원사인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4월 롯데 챔피언십대회에서 박인비와 연장전까지 치렀지만 연장전에 샷 이글로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그때 박인비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세영은 기적을 몰고 다니는 선수’라고 말했었다.
“인비 언니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 와, 진짜 감사하다. 인비 언니는 같은 골프 선수가 봤을 때 우리와 ‘급’이 다른 선수로 보인다. 정점을 찍은 선수라 자기만의 힘이 있다. 인비 언니의 강인한 정신력을 닮고 싶다.”
―‘멘탈’과 관련해선 김세영 프로도 내공이 깊지 않나. ‘역전의 여왕’이란 타이틀이 붙을 만큼.
“난 인비 언니 따라 가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나도 어느 위치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갖고 있다. 사실 인비 언니와 연장전에서 맞붙었던 롯데 챔피언십대회는 연장전을 치르는 동안 인비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무조건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누가 불러도 캐디와 그린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샷 이글이 나오더라.”
―시즌 3승을 거둔 블루베이 LPGA대회에서 챔피언 조에 포함된 스테이시 루이스에 대해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한 바 있다. 그 내용이 ‘그녀는 나의 우상이다. 오늘 같이 경기해서 영광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였다.
“스테이시 루이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다. LPGA 투어에서 만난 이후 그의 팬이 됐다. 그는 남들과 섞이지 않고 마치 ‘골프 장인’처럼 하루 24시간을 골프에 맞춰 생활한다.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한 길만 보고 가는 모습에서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루이스가 먼저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였나.
“아마추어 고등학교 선수에서 프로로 전향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이전에는 골프 선수로 살아가는 걸 당연시했는데 자아가 형성되면서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그때 혼란스런 경험을 많이 했다. 때마침 드라이버 입스로 정신력과의 싸움을 벌였다. 다행히 좋은 트레이너 선생님(양호직)을 만나 짧은 시간에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호직 선생님이 지금은 트레이너뿐만 아니라 멘토 역할까지 맡고 계신다.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LPGA 데뷔를 앞두고 걱정한 부분이 있다면?
“사실 2014 시즌에 LPGA로부터 초청을 받아 연습 삼아 미국 투어를 경험했던 게 올 시즌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물론 데뷔 첫 경기에서 예선 탈락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웃음).”
―그러게 말이다. 지난 2월 LPGA 투어 개막전 코츠 골프챔피언십 대회에서 2라운드로 8오버파로 컷 탈락했었다.
“컷 통과 기준인 4오버파에도 한참 못 미쳤고, 순위도 100위권 밖으로 밀려난 참담한 성적표였다. 내가 LPGA 대회를 너무 만만하게 봤나? 싶더라. 예방 주사를 제대로 맞았다. 개막전에서.”
―그런데 그 다음 대회인 퓨어실크 바하마 클래식에선 데뷔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전 대회에서 예선 탈락했던 선수가 다음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건 정말 극적인 반전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연습에 충실했다. 하루 5시간 넘게 퍼트 연습에 매달리며 이전 대회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복기했다. 첫 승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3라운드까지 (박)인비 언니가 선두였고, 선두에 2타 차 뒤진 공동 6위로 최종 라운드를 맞이했다. 15번 홀까지 유선영 선수에게 1타 차 2위에 머물다 마지막 홀 버디로 연장에 합류했고, 연장 첫 홀에서 버디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꿈같은 일들이 그 대회에서 벌어졌다.”
―LPGA 투어 첫 승과 KLPGA 대회 첫 승 중 어느 ‘첫 승’이 더 의미가 있나.
“난 2013년 4월 KLPGA 개막전 롯데마트 여자오픈에서 첫 승을 올렸던 게 훨씬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나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대역전극을 펼치며 정상에 올랐다. 2012 프로 첫 시즌에는 20개 대회에 참가해 톱10에 3차례 들고 상금 랭킹 32위에 머물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기고 때를 기다리며 2013 시즌을 맞이했고, 그 해 개막전 최종 라운드 마지막 18번홀(파5)에서 극적으로 이글을 잡으며 프로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다. 만약 그 우승이 없었다면 프로에서 빠른 시간에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올 시즌 이룬 성적에 대해 만족하나.
“80% 정도는 만족한다. 시즌 마칠 때까지 중요한 2개 대회가 남아 있다. 그래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해피엔딩’으로 시즌을 마무리하는 게 목표이다.”
아버지 김정길 씨
“정말 받고 싶다(웃음). 내가 수상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아직 확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만약 신인왕과 올림픽 출전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걸 택하겠나.
“올림픽 출전이다. 물론 신인왕 수상도 욕심이 나지만, 올림픽은 태극마크를 달고 뛰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세영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 ‘빨간 바지’가 있다. 최종 라운드에는 항상 빨간 바지를 입었고, 빨간 바지를 입었을 때 우승한 일이 많았다. 언제까지 빨간 바지를 입을 건가.
“골프를 그만둘 때까지(웃음)? 빨간색은 내게 좋은 기운을 주는 것 같다. 다른 건 포기해서 빨간 바지는 포기 못한다.”
―장하나, 김효주 등 또래들과 LPGA 투어에서 경쟁하는 데 대해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아니다. 난 그런 경쟁 자체를 즐긴다.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과 함께 미국에서 경기를 펼친다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시합 중에는 치열한 승부를 펼치지만 골프장을 벗어나면 친분을 나누며 식사도 같이 하고 노래방도 가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영어를 언제 그렇게 배웠느냐”고 물었다. 김세영은 “저, 영어 못해요. 친구들이 ‘된장 영어’라고 매일 놀려요”라며 까르르 웃는다.
김세영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김정길 씨 덕분에 태권도 3단을 획득한 ‘태권소녀’다. 163㎝로 골프 선수치고는 큰 편이 아니지만 태권도로 단련된 단단한 하체는 그를 ‘장타왕(264.7야드)’에 올려놓기도 했다. 긍정적인 마인드, 그를 뒷바라지하는 아버지의 희생, 그리고 못 말리는 승부욕은 김세영의 ‘오늘’보다 ‘내일’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강원도 홍천=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