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짱인 김대리 눈치 꽝인 이유가…
은행원 고바야시 씨(가명·32)는 ‘성인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유독 힘들어 지각하는 일이 잦았다. 일단 잠자리에 들면 10시간 이상 수면을 취할 때가 많고, 알람시계가 아무리 울려도 잠에서 깨지 못한다. 고등학교까지는 부모님이 깨워줬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대학에 진학하면서 독립한 뒤로는 늦잠 자는 습관이 더 악화됐다.
거래처와의 중요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약속장소에 나가기 전 다른 일이 자꾸 신경 쓰여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보면 늦어지게 되는 것. 상대방이 기다리지 않게 약속을 우선시해야 되는데, 웬일인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게다가 동료들과도 잘 사귀지 못해 직장에서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결국 그는 우울증에 걸려 병원을 찾게 됐다.
이런 사례도 있다. 통신회사에 다니는 20대 남성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해 직장에서 ‘이상한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령 상사로부터 “크게 급한 건 아니니까 적당히 알아서 하면 되네”라는 지시를 받았을 경우, 그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며칠이 지나도 보고가 없자 “지난번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지?”라고 상사가 물으면 그때서야 “급하지 않다고 해서 아직 손대지 않았다”고 답해 상사를 화나게 만든다. 또 “출장은 어땠어?”라는 동료의 질문에 “8시 출발 열차를 타서 11시에 도착했다”는 식의 뜬금없는 발언으로 말문을 막아버린 적도 많다.
이처럼 매사 일처리의 우선순위를 모르고, 약속을 못 지키고, 남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한다면 발달장애를 의심해 봐야 한다. ‘발달장애’란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행동해 집중을 못하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대인관계 능력이 미숙한 아스퍼거증후군, 계산과 독해 능력이 부족한 학습장애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흔히 아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문제라고 발달장애를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른들도 발달장애를 앓는다. 위의 사례가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현대 일본인이 안고 있는 사회문제를 심층 취재하는 NHK 프로그램 <클로즈업 현대>에서도 급증하는 어른의 발달장애를 다뤄 화제를 모았다. 방송에 따르면 “한 대학병원의 경우 관련 진료 예약전화가 매달 200건으로 4년 전보다 10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한다. 대체로 의사소통에 고충을 겪어 진료받기를 희망하는 직장인들이다.
그렇다면 발달장애를 가진 성인들은 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걸까. 도쿄대학병원에서 ‘웃는 얼굴로 부정적인 말을 할 경우 사람의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조사한 결과, 일반인은 말뿐만 아니라 표정까지 살펴 상대의 의도와 기분을 파악했다. 이때 뇌의 전두전야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스퍼거증후군 같은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전두전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표정으로부터 상대의 의도를 해석하는 힘이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미 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어른의 발달장애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일본의 경우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년 전부터다. 따라서 이토록 어른의 발달장애가 급증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그동안은 성인 발달장애가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발달장애라고 하면 아이들의 전유물로 알거나, 그나마도 주의력이 부족해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증상으로 여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오해다. ADHD나 아스퍼거증후군은 자신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특징이 있어 오히려 성적이 좋은 사람도 많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이자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의 저자인 호시노 요시히코 교수는 “성적이 좋으면 이상한 행동을 해도 부모는 ‘별난 아이’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기 쉽다. 이로 인해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고 지적했다. 학교에서도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이 뛰어난 학생이라면 다소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보이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대학교까지는 성적도 괜찮고, 부모의 관리 아래 별다른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에 진출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심지어 자신이 발달장애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에게 부적합한 직업은 영업이나 관광업, 인사총무 관리, 금융관계, 예약담당이나 고객창구 같은 일이다. 상대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고도의 협조성과 대인기술, 임기응변을 요하는 업무는 그들에게 너무나 버거운 과제다.
결국 직장 내에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 찍혀 고립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약하다는 점이다. 주변의 냉대가 심해지면 ‘나는 왜 이럴까’ 끝없는 자기비하에 빠진다. 알코올에 의존하게 될 확률이 높고 도박, 쇼핑, 섹스 등에 중독되거나 우울증 같은 합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호시노 교수는 “발달장애를 개성으로 살릴 수 있는 직업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관심의 대상 살피기 ②잘하는 걸 적어보기 ③그 가운데 수입이 될 만한 걸 찾기 등 3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나 학자, 컴퓨터프로그래머, 만화가, 디자이너, 저널리스트, 조리사, 회계사, 증권분석가 등의 직업이 어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와모토 도모노리 씨(36)는 3년 전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영업직으로 근무하던 전 직장에서는 ‘한심한 문제아’로 눈총을 받기 일쑤였고, 우울증까지 앓던 그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알맞은 직업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그것이 ‘분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품 분석을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 뒤 외국계회사 데이터 분석 관련으로 이직했고, 지금은 담당 분야 예측정밀도에서 사내 랭킹 1위라는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 중이다.
호시노 교수는 “발달장애의 본질적인 원인은 뇌에 있으며, 결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40~50대 성인도 충분히 치료될 수 있다는 것. 덧붙여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 가운데는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중요한 것은 먼저 본인이 발달장애임을 인지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전문가에게 정확한 진단을 받고 적절한 치료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