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원의 시대에 ‘음반’을 외치다
‘음유시인’ 루시드폴이 신규 앨범 판매를 위해 홈쇼핑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감귤 모자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앨범을 홍보하는 루시드폴(위)과 함께 출연해 홍보를 도운 동료들(왼쪽). 방송 화면 캡처.
“본심이 왜곡될까 걱정했다”는 루시드폴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이 앨범을 사서 음악을 접할지를 고민했다. 음원의 시대에서 CD 한 장에 담긴 뮤지션의 정성과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루시드폴은 감귤 모자를 뒤집어쓰고 홈쇼핑에 출연했다. 소속사 대표이자 선배 뮤지션인 유희열을 비롯해 정재형, 페퍼톤스, 이진아 등이 함께 출연해 루시드폴을 격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앨범 1000장이 9분 만에 완판됐다. 홈쇼핑의 핵심인 ‘구성’이 좋았다. 지난해부터 제주도에서 터를 잡은 루시드폴이 직접 재배한 감귤과 그가 쓴 동화 등을 묶었다.
루시드폴은 신보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소속사 식구들과 소주 한잔 하는 자리에서 ‘CD와 책, 직접 수확한 귤을 같이 팔고 싶다’고 했더니 유희열 대표가 ‘홈쇼핑과 연결해서 팔아보자’고 제안했다”며 “욕을 먹을 것 같아 걱정이 됐는데 많은 분들이 유쾌하게 봐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처음 루시드폴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렸다. “신선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저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루시드폴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음원 위주로 재편된 가요계에서 앨범의 구매 가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됐기 때문이다. ‘음원’의 중심에서 ‘음반’을 외친 셈이다.
분명 요즘은 음원 시대다. 몇 년간 공을 들인 정규 앨범이 아니더라도 음원 한 곡을 발표하며 ‘컴백’을 선언할 수 있다. 10여 곡이 담긴 앨범을 발표해도 타이틀곡 1, 2곡을 제외하면 묻히기 일쑤기 때문에 이를 나눠서 발표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싱글앨범’을 몇 곡 내면 이를 묶어서 ‘미니앨범’을 만들고, 다시 미니앨범 몇 장이 나온 후 타이틀곡 1, 2곡을 붙여서 ‘정규앨범’을 만든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선뜻 정규앨범을 발표하는 가수들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 “왜 정규앨범을 발표하셨어요?” 싱글앨범으로 전전하는 일부 가수들이 받아야 할 질문을 오히려 앨범 한 장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가수들이 받고 있는 것이다.
왼쪽부터 브라운아이드소울, 신승훈, 싸이.
지난해 말 4인조 브라운아이드소울은 정규 4집 앨범 <솔 쿡>(Soul Cooke)을 발표했다. 무려 17곡이 담겼다. 멤버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들은 발표 직후 각종 음원 차트에서 일명 ‘줄세우기’에 성공했다. 타이틀곡 ‘밤의 멜로디’와 ‘홈’은 장기간 차트 상위권에 머물렀지만 다른 곡들은 조금씩 차트 순위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그들이 17곡을 눌러 담은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리더 정엽은 새 앨범 발표 기념 기자회견에서 “트랙리스트 안에는 우리가 담고 싶은 서사, 이야기가 분명 들어 있다”며 “퍼즐을 맞추듯 한 곡씩 들으면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가수 싸이 역시 지난 연말 3년 만에 발표한 정규 7집 <칠집싸이다>를 더블 타이틀곡 ‘나팔바지’와 ‘대디’를 포함해 9트랙으로 구성했다. ‘발라드의 황제’라 불리는 가수 신승훈 역시 9년 만에 발표한 정규 앨범 11집 <아이엠 앤 아이엠>(I am…&I am)을 총 12곡으로 채웠다. 품귀 현상을 빚기도 한 신승훈의 11집은 ‘소장가치가 있는 앨범’이라 불렸다. 이는 ‘음반’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각종 음원사이트를 통해 어느 곳, 어느 때나 불러낼 수 있는 ‘음원’은 소장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인스턴트식으로 소비되며 새롭게 발표되는 다른 음원에 밀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음반이 책장에 꽂혀 추억으로 남는 것과 대비된다.
브라운아이드소울은 “요즘 CD가 뭔지 모르는 어린 친구들이 있다고 하더라. 감성이 소멸되는 거 같아 아쉽다. 복고가 트렌드인 만큼, 아날로그 감성이 음악에서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음반 시장이 축소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음반은 제작되고 팔린다. 하지만 음반 시장 역시 강한 팬덤을 가진 아이돌이 주도하고 있다. 2015년 앨범 판매량 순위를 살펴보면 엑소(EXO)가 120만 장으로 1위고, 빅뱅(42만 장)과 방탄소년단(34만 장)이 그 뒤를 잇는다. 나머지 순위 역시 샤이니,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빅스 등이 채우고 있다. 팬덤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앨범 판매 역시 저조하다는 의미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듣는 음악’보다 ‘보는 음악’을 선보이는 아이돌이 가요계의 주축이 되며 싱글앨범이 보편화됐다. 이를 바탕으로 인기를 끌면 그들의 앨범까지 판매량이 는다”며 “이를 바라보는 정통 가수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런 분위기를 바꿀 톱클래스 가수들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가요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지난해 해외로 눈을 돌리면 팝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델이 약 5년 만에 신곡을 발표하며 스트리밍 서비스를 거부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싶으면 앨범을 사야 한다는 의미다. 팬들은 아델의 노래를 듣기 위해 기꺼이 앨범을 사거나, 제값을 주고 그의 노래를 다운로드했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성 테일러 스위프트 역시 지난 6월 자신의 SNS에 “애플처럼 진보적이고 관대한 기업이 스트리밍 서비스 무료 체험기간에 로열티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은 충격적이고 실망스럽다”면서 새 앨범 <1989>를 애플뮤직에 제공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팬들은 이를 지지했다. 1명의 가수가 대형 유통사의 폐부를 찌른 것이다. 결국 애플뮤직은 무료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 다른 가요계 관계자는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로 주로 음악을 듣는 환경 속에서 가수들이 상대적 피해를 감수하며 이런 소신 있는 발언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면서도 “하지만 국내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가진 가수들이 이런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다면 음악이 쉽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음원 시장을 견제하며 앨범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