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애플처럼 ‘문화’를 만들어라
현대자동차는 고급차 브랜드인 제네시스 EQ900 신차발표회를 한 데 이어 외국인 스타 임원진을 추가로 영입하는 등 글로벌 고급차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12월 28일 실시한 2016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람보르기니 브랜드총괄 임원 출신의 맨프레드 피츠제럴드(Manfred Fitzgerald)를 제네시스 전략담당 전무로 임명했다. 지난해 제네시스 브랜드 론칭 당시 정의선 부회장이 예고한 대로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 출신의 루크 동커볼케(Luc Donkerwolke)는 현대디자인센터장(전무)에 임명됐다.
앞서 지난해 4월 현대차는 BMW 출신의 고성능차 개발 담당 부사장으로 알버트 비어만(Albert Biermann)을 영입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에는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 현대·기아차 디자인총괄 사장을 포함해 총 4명의 유럽 명차 출신 외국인 임원이 포진하게 됐다.
피터 슈라이어 사장은 현대기아차 디자인을 총괄하고, 루커 동커볼케 전무는 디자인센터를 맡아 실무를 지휘하게 된다. 알버트 비어만 부사장은 엔지니어링, 브랜드전략은 맨프레드 피츠제럴드 전무가 담당하면서 ‘디자인-엔지니어링-브랜드전략’의 삼각편대가 완성된 것이다. 각 브랜드의 스타 개발자를 영입하다 보니 약간 과장해 ‘외인 어벤저스’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외국인 임원 진용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2005년)한 직후인 2006년 아우디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최고 디자인 책임자(부사장)로 영입한 이후 ‘디자인경영’을 표방하며 기아차 브랜드를 한 단계 끌어올린 바 있다. 디자인경영을 통해 선보인 쏘울, K7, K5 등은 국내외에서 ‘형님’ 격인 현대차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인기를 누린 바 있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그는 2009년 현대차그룹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총괄 부회장에 올랐고, 이후 본격적인 그룹 체질 개선에 나섰다. ‘체질 개선’이란 쉽게 말해 구세대 경영진을 신세대로 교체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1991년 현대차 최초 독자개발 엔진을 만든 이현순 전 부회장이 회사를 떠났고, 40년 동안 회사에 몸담았던 박승하 현대제철 부회장이 물러났다.
꼭 사람을 바꿔야만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회사에 몸담은 직장인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회사의 모든 직원은 최고 결정권자의 취향대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두 번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드한 사람은 올드한 차를 만들고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차를 만드는 법이다. 새로운 차를 만들려면 세계적 명차 수준의 감각을 지닌 전문가를 모셔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새로운 차를 만들어야 할까? 힌트는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에 있다. 우선은 2억 원이 넘는 고급차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또는 EQ900 외에도 1억 원이 넘는 차들을 다수 출시해야 한다. 현대차는 기술적으로는 이미 세계적 반열에 올라 있다.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인데, 그 안에서도 현대차그룹은 세계 5위 생산량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고가 차량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는 자동차 생산 역사가 짧아 ‘문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최초로 자체 브랜드를 달고 생산한 자동차는 1976년 출시된 포니다. 일본은 1936년 도요타자동차가 생산한 ‘AA형’이 최초다. 유럽은 자동차의 원조답게 최초의 현대식(증기기관 아닌 가솔린 엔진) 자동차 생산이 1885년 다임러와 벤츠에 의해 시작됐다. 미국(1893년 첫 차 개발, 1895년 생산)은 영국(1887년), 독일·프랑스·이탈리아(1889년)에 비해 늦었지만, 1920년대 전 세계 자동차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자동차산업을 꽃피운 나라다.
공장도가격 1만 원의 나이키 운동화가 20만 원에 팔리는 것은 단순히 사용가치가 아니라 문화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나이키를 신으면 왠지 ‘액티브’하고, ‘트렌디’하고, ‘패셔너블’하고, ‘헬시’한, 뉴요커가 된 기분이 드는 것, 그것이 문화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이 애플 컴퓨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휴대폰을 팔았지만, 애플과 영업이익을 비교하면 18(삼성전자) 대 82(애플)로, 이익률에서 애플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것이 제품에 담긴 문화의 힘이다.
구세대 경영진이 극복하지 못한 것도 제품에 담긴 무형의 가치다. 스타벅스 커피가 ‘세상에 둘도 없는 사치’라고 생각한다면, 한국은 영원히 스타벅스 같은 브랜드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새마을운동 정신이 뼛속 깊이 박힌 경영진이라면 영원히 람보르기니 같은 브랜드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비단 자동차뿐만 아니라, 현대적 의미의 제조업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에 한국 제품 치고 세계 시장에서 추앙받는 제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
문화가 중요하다고 해서 기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루이비통을 샀는데 실밥이 쉽게 풀어진다면 명품 대접을 받을 수 없듯이, 무형의 가치는 기술적 숙련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현대차 정도면 이제 그런 숙련도를 완성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예상되는 것은 ‘히딩크 효과’다. 현대차처럼 큰 조직에서 임원이 되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힘들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많아야 가능하다. 그렇게 원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간 도움을 준 사람을 챙길 수밖에 없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조직 내 조직’이 생기는 결과를 부른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처럼 외국인 최고책임자가 오면서 인맥과 서열이 깨지면 박지성 같은 선수가 발탁될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중에는 선수들 간에 이름을 부르도록 해서 선후배 간의 서열이 개입되지 않도록 지시했다. 수평적인 문화가 정착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즉 외국인 임원의 영입은 외부적으로는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림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조직의 인력 운용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지난 10년간 정의선 부회장은 외국인 임원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완성해왔다. 지금 현대차의 과제는 과거의 현대차를 뛰어넘는 것이다. 정 부회장의 ‘외인 어벤저스’가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지 지켜보는 것은 현대차가 내놓는 자동차를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롭지 않을까.
우종국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