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7일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 복싱챔피언(국제여자복싱협회(IFBA) 플라이급)에 오른 이인영(32·산본체육관)은 기자의 ‘밀착체험’ 취재 제의에 연출이 아닌 실제 스파링을 요구했다. 세계챔피언의 훈련 과정에 동참하면서 연기로 스파링하는 장면을 찍을 생각이었던 기자 입장에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나이와 체력적인 조건을 거론하며 거듭 ‘연출’을 부탁하는 사람한테 이인영은 “복싱은 여자 나이 30대 이후부터가 전성기”라며 결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계챔피언이 된 이후부터 방송 출연과 각종 인터뷰 등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인영이 훈련을 재개하던 첫 날, ‘이게 마지막 인터뷰’라는 말에 가슴 떨리는 심정으로 실제 스파링을 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13일 오전 5시40분, 평촌의 자유공원 앞에서 이인영과 함께 로드웍을 시작으로 한 ‘알딸딸 밀착 체험’ 현장을 소개한다.
‘밀착 체험’이란 타이틀에 ‘알딸딸’을 붙인 것은 사람이 술을 안 마시고도 얼마나 정신이 몽롱해질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빗속의 로드웍을 마치고 산본체육관으로 옮길 때만 해도 걱정과는 달리 몸이 한결 가벼워져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의욕이 넘쳐났다. 더욱이 헤드기어를 낀 상태로 하는 스파링이라 잘만 때리면 복부 가격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다소 ‘건방진’ 착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파링을 하기 전 기본적인 스텝 밟기를 배우고 원투 스트레이트와 잽을 날리는 연습만 반복해도 숨이 차 올랐다. 복싱이 비록 상대를 두들겨 패서 쓰러뜨리는 경기이긴 하지만 실제 내용은 훨씬 정교하고 기술적인 동작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원투’는 고사하고 전후로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스텝 밟기가 너무 어려웠다. 춤을 추듯 가볍게 움직이라는 ‘이 코치’의 지시에 “춤이라면 자신 있다”며 부드러운 율동을 선보이자 “누가 진짜로 춤을 추라고 했냐”며 연이은 구박이 쏟아진다.
원투스트레이트는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스텝은 꼬이고 왼손과 오른손은 주인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제각각 뻗어나가고, ‘새벽부터 이 무슨 고생인가’ 싶은 후회 막급의 심정이 될 찰나, 챔피언이 끼고 있던 미트가 기자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마음 같아서는 스파링이고 뭐고 ‘스톱!’을 외치고 싶을 뿐이었다.
“권투를 처음 배운 사람이 링 위로 올라오려면 6개월 정도가 걸려요. 기자님은 행운인지 아세요.” 그런 ‘행운’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이인영은 키 159cm, 몸무게 51kg의 왜소한 체구였지만 링 위의 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외모는 작아 보여도 상대를 압도하는 눈빛에선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본격적인 스파링이 시작됐다. 취재 현장에서 복싱 경기를 지켜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조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움직였다. 이인영은 ‘얼마든지 쳐보라’며 배짱을 퉁겼다. 사전에 배운 대로 어정쩡한 원투 스트레이트도 날려보고 복부 쪽을 노리며 스텝을 밟았지만 손이 나가기도 전에 챔피언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다. 몇 차례 얻어맞자 자꾸 상대방에게 등을 보이게 되었다. 이인영은 반칙이라며 항의했다. 그러나 반칙이고 뭐고 일단 ‘목숨’을 보전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하필이면 그 순간 왜 ‘동네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
1라운드 3분도 되기 전에 그로기 상태로 치달았지만 정말 이인영은 조금도 봐주질 않았다. 그나마 기자의 지속적인 사회생활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 ‘살살 때린다’고만 말할 뿐 계속 ‘파이팅’을 요구했다. 조금씩 스텝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손놀림이 훨씬 자유스러워졌다. 무조건 얼굴을 커버하고 있던 상태에서 상대의 허점을 찾아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려보기도 하고 팔을 휘저으며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헤드기어를 썼다고 해도 챔피언의 연타에 ‘별’을 헤아리는 일조차 버겁게만 느껴졌다. 결국 복부 옆을 정통으로 맞는 순간 ‘악’ 소리를 내며 이내 링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인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괜찮냐’고 물었다. 어찌 괜찮을 수가 있을까. 정신이 몽롱해졌다. 코피 안 터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3분이었는데 맞는 것도 힘들었지만 뛰어다니는 일도 벅찼다. 복싱 경기를 보면서 체력이 떨어지는 선수들을 비난했던 일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링 밖에서 보는 링 위는 선수들의 주먹만이 존재했지만 링 안에서 직접 겪은 링 위의 세계는 훨씬 고달프고 치열하고 처절했다.
▲ 챔피언은 분명히 장난인 것 같은데 기자는 죽 을 맛. 1라운드 3분도 헐떡거리며 근근이 버티 던 이영미 기자는 복부 한 방에 그대로 주저앉 고 말았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사실 요즘 많이 힘들어요. 세계챔피언이 되긴 했지만 복잡한 문제들이 터지면서 심각하게 복싱을 그만둘 생각도 해봤습니다. 절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만 보는 프로모터와의 이해관계, 여자 복서라는 흥미위주의 매스컴의 시각, 여전히 힘든 경제 여건 등 기죽이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제가 복싱을 계속 하는 게 낫겠죠?”
세계챔피언에 오르긴 했지만 이인영은 여전히 산본의 지하 셋방에서 가족들의 십시일반 격의 지원을 받아가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챔피언전에서 받은 파이트머니가 5백만원이었지만 실제 손에 쥐는 돈이 극히 적었다고 한다.
“그래도 처음에는 대전료로 10만원을 받았어요. 그때에 비하면 엄청난 신분 상승을 이룬 셈이죠.”
지금까지의 전적이 8전8승(4KO). 1차 선택방어전이 12월 말이나 1월 초순께에 잡힐 예정이다. 트레이너 한 명 없이 친언니를 트레이너 겸 운전기사 겸 스파링 파트너 삼아 혼자 운동하고 있는 세계챔피언은 40세가 될 때까지 링 위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한다.
이인영의 펀치에 울고 가슴 아픈 인생 이야기에 푹 젖어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혹시 ‘펀치 드렁크’ 아닐까? 앞으로 두들겨맞는 체험은 ‘절대 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