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이상한 남자 ‘살인의 추억’ 진짜였다
피해자 김 씨가 거주하던 움막 외부 모습과 사건 당시 내부 모습. 울산 움막 살인사건은 뚜렷한 실마리가 발견되지 않아 허 씨의 진술이 없었다면 미궁 속에 빠질 뻔했다.
울산 울주경찰서 박동일 강력3팀장은 당시 해당 파출소에서 근무 중이었다. 앞서 울산 중부경찰서 강력팀장이었던 그는 울주경찰서로 발령 받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이동이 결정된 탓에 울주경찰서의 형사 보직이 꽉 차 있어, 인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임시로 파출소에서 근무를 해야 했던 것. 30년 동안 형사로 복무한 경찰에겐 이례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박 팀장은 오히려 ‘운명적인’ 인사이동이었다고 했다.
울산 울주경찰서 박동일 강력3팀장. 1년 6개월의 추적 끝에 움막 살인사건의 퍼즐을 맞췄다
그런데 이야기 중간 중간 믿기 어려운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살인’이었다. 장황한 횡설수설이 이어지다 “내가 2년 전 사람을 죽였다” “살인을 했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식이었다. 자칫 스쳐지나갈 수 있는 찰나의 순간에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박 팀장은 “허 씨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허 씨가 지난 2012년 살해했다고 주장한 피해자는 울주군 온양읍 무도산 기슭 움막에 혼자 살던 김 아무개 씨(당시 71)다. 동시에 김 씨는 18년 전, 울산의 한 서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의자의 ‘아버지’였다. 박 팀장이 울산 중부경찰서에서 근무하던 때 발생한 사건이었다. 박 팀장은 “서점 살인 사건은 직접 담당했던 사건이라 김 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허 씨는 살인에 대해 되물으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려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박 팀장은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박 팀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허 씨만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의 삶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박 팀장에 따르면 허 씨는 4년제 국립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학습지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대기업의 주식을 일부 갖고 있기도 했고, 가족과의 관계도 원만한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또한 허 씨는 글 솜씨가 뛰어났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컴퓨터에 보관해왔는데, 박 팀장을 통해 기자가 직접 확인해본 결과 논문에 가까울 정도로 논리적으로 잘 정돈된 글이었다. 실제로 허 씨는 국내 유명 일간지와 지방지 등이 개최하는 신춘문예에 수차례 소설을 보낼 정도로 작문에도 관심이 많았다.
박 팀장은 허 씨에게 “마음이 안 좋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알려줬다. 이후 허 씨는 박 팀장에게 늦은 밤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기도 했고, 떠오른 생각들을 설명하기도 했다. 박 팀장은 “허 씨가 ‘변이 안 나온다’는 연락을 해도 집까지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자주 만났다”고 말했다. 박 팀장과 허 씨가 가까워지자, 허 씨는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박 팀장을 만나는 날이면 잘 다려진 양복을 입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 씨는 ‘살인’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움막살인사건 재수사가 결정되며 열린 첫 브리핑. 오른쪽은 허 씨가 살해 도구를 숨겼다고 진술한 곳을 경찰과 해병대 전우회가 합동으로 수색하는 모습. 범행 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김 씨를 살해할 때 사용한 둔기와 가격 부위부터, 김 씨가 쓰러진 이후 복부를 발로 밟았던 점, 범행 이후 이불을 덮어 놓고 나온 점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박 팀장은 “허 씨가 범행 동기에 대해 ‘울주군수가 되려면 큰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김 씨를 살해했다’며 다소 믿기 힘든 말을 한 데다 김 씨가 살던 움막이 불에 타 폐허가 된 상태라 현장에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허 씨의 진술은 일관됐고 범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범인만이 알 수 있는 진술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피해자 김 씨가 거주하던 움막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폐허가 돼 있다.
그런데 허 씨는 “김 씨 살해가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살해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이었다. 허 씨는 박 팀장에게 “지난 2012년 2월, 옆집에 몰래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할머니를 뒤에서 야구 방망이로 내려쳐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를 살해하기 4개월 전이었다. 그는 “자꾸 머릿속에서 ‘옆집 할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이 할머니와 결혼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 살해했다”고 덧붙였다.
박 팀장은 허 씨가 살해했다고 주장한 할머니가 실제로 허 씨의 옆집에 살던 노 아무개 씨(당시 75)라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수차례 조회를 해봐도 경찰 신고 접수는 없었고, 사망자 등록도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노 씨가 살던 집은 사라지고 원룸이 들어서 있는 상태였다. 인근 주민들의 진술도 엇갈렸다. 일부는 “어제까지 그 할머니를 봤다”고 진술하는가 하면, 또 다른 주민들은 “못 본 지 한참 됐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그동안 해온 수사와 확인 절차가 모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고 귀띔했다.
수소문 끝에 결국 노 씨의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가족들은 “어머니가 쓰러진 것을 경찰이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다. 가족에 따르면 노 씨가 쓰러진 것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는데, 당시 의사가 “두개골이 여러 군데 골절돼 있다. 단순히 넘어진 것으로 생길 수 있는 부상이 아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이 어렵던 가족들은 폭행 사건으로 처리되면 거액의 병원비에 대한 의료 보험 적용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일단 어머니를 살리고 생각하자”는 생각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사건 발생 이후 노 씨는 뇌출혈로 2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있었던 상태였다.
허 씨의 진술을 확인하려면 노 씨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허 씨가 구속도 되지 않은 상태라 가족의 양해 없이는 확인은 불가능했다. 단지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 달라”는 말만 남길 수 있었고, 가족들은 경찰과 연락을 끊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놀라운 일이 생긴다. 박 팀장이 동료를 따라 장례식장에 갔는데, 노 씨의 장례식이 함께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 팀장은 “찾아갔던 고인은 일면식도 없는 경찰 관계자였다. 동료가 제안해 함께 갔는데, 이미 발인 날짜도 하루가 지난 뒤라 잘못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노 씨의 장례식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그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수차례 양해를 구해 국과수에 노 씨의 부검을 의뢰해 앞서의 허 씨 진술에 대한 확인 절차를 마무리했다.
현재 허 씨는 살인 혐의로 경찰에 구속돼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정신감정을 받고 있다. 경찰은 허 씨가 감정을 마치면 피의자 조사를 한 뒤,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예정이다. 허 씨가 파출소로 찾아온 지 1년 6개월, 사건 발생 3년 6개월 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구 미제로 남을 뻔했던 이번 사건을 해결한 강력 3팀은 현재 울주경찰서 내에서 실적이 최하위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사건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기 교육 등 승진에 반영되는 모든 절차는 뒤로 미루거나 포기했다. 최근 강력 3팀은 박 팀장과 강병섭 반장을 제외하고 모두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동안 강력 3팀은 사건 발생 이후 폐허가 돼 버린 사건 현장에서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수색을 했고, 허 씨가 연락도 없이 사라지면 그를 찾아다니거나 잠복근무를 해야 했다. 허 씨가 횡설수설하며 진술한 모든 사실에 대해 직접 확인했다. 주변에선 “그런 고생을 왜 하냐”며 우려하기도 했지만, 명예퇴직을 3년 앞둔 박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니까 하지, 누가 하겠나.”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사건의 개요 미궁 속 범인이 제발로… 지난 2012년 6월 19일 오후 5시께, 울산 울주군 온양읍 무도산 기슭 움막에 혼자 살던 김 아무개 씨(71)가 움막 내에서 숨져 있는 것을 지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또다른 피해자인 노 씨 할머니의 CT 사진. 두개골 곳곳이 골절돼 있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둔기나 지문 등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김 씨가 머물던 움막이 인근 마을에서 1.7㎞가량 떨어진 외진 곳이어서 목격자와 CCTV가 없었다. 김 씨와 평소 알고 지내던 주변인물 가운데 갈등이 있었던 일부를 용의자로 특정했으나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 경찰은 김 씨의 손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범인의 DNA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국과수 검사 결과 김 씨가 구타를 당하며 방어하는 동시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뜯어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수사는 점점 미궁에 빠졌다. 이후 경찰은 지난 2014년 6월, 허 씨가 파출소에 찾아와 자신이 움막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진술을 확보하고 재조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허 씨가 범행 도구와 방법 등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진술을 일관되게 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이 과정에서 허 씨가 범행 과정에서 김 씨의 복부를 한 차례 발로 밟았다고 진술한 점과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김 씨의 옷이 발로 밟힌 흔적이 있었던 사실이 서로 일치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또한 경찰은 또 허 씨가 옆집 할머니를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한 사실도 밝혀냈다. 지난 2012년 2월 13일 오전 8시 30분께 허 씨는 옆집에 침입해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노 아무개 씨(여·75)를 폭행해 두개골 골절로 인한 뇌출혈로 숨지게 했다. 그러나 노 씨의 가족이 치료를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서 경찰의 수사선상에도 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지난 6일 허 씨의 연쇄 살인 혐의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