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낙하산’들의 ‘휴게소’
지난해 3월 28일 오후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대 SK 와이번스의 개막경기에 앞서 KBO 구본능 총재가 개막 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공식적인 총재의 역할은?
KBO 총재의 임기는 3년이다. 각 구단 사장단이 모인 이사회에서 재적이사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받아 추천하고, 구단주 총회에서 재적회원 4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 선출하게 된다. 야구 규약에는 총재의 직무에 대해 공식적으로 ‘KBO를 대표하고 이를 관리 및 통할한다’고 명시돼 있다.
구본능 총재가 2015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두산의 김태형 감독에게 트로피를 전달하는 모습.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KBO 총재는 현재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총재의 연봉은 KBO 예산에 편성되지 않는다. 두산그룹 회장이었던 고 박용오 총재 시절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가 후임 신상우 총재 때 연봉 1억 8000만 원과 업무추진비 1000만 원이 지급됐다. 그러나 명지학원 이사장이었던 후임 유영구 총재 때 다시 무보수로 돌아갔고, 희성그룹 회장인 현 구본능 총재도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한다. 반면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인 롭 맨프레드는 스타플레이어들에 맞먹는 연봉 2500만 달러를 받는다. 전 세계 프로스포츠 가운데 최고 연봉 커미셔너로 추정되는 인물은 미국프로풋볼(NFL)의 로저 구델. 2013년 연봉이 무려 3500만 달러에 달했고, 2014년부터는 연봉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 초대 총재는 대통령 최측근
프로야구 제1~2대 총재인 서종철 총재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 후보 세 명 가운데 직접 선택한 인물이었다. 전 전 대통령이 사석에서 “나의 영원한 스승”이라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고, 이런 배경 덕분에 초창기 프로야구의 인프라를 다지는 데 큰 공을 세운 게 사실이다.
초대 총재 서종철
서 총재는 임기 만료를 5개월 앞둔 1987년 10월 사임했다. 총재 역할을 맡은 지 2299일 만이었다. 프로야구 이사회가 “총재로 재추대하고 싶다”고 만류했지만, 프로야구 창립일인 12월 11일에 퇴진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일흔을 훌쩍 넘긴 2001년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맡는 등 KBO와의 연을 끊지 않았고, 2010년 11월 향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단 26일 만에 퇴진한 총재가 있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의 출발은 태동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부의 ‘우민화 정책’ 가운데 하나로 해석되고 있어서다. 초대 총재에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를 앉힌 것은 물론, 이후 KBO 총재를 거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드러난다. 3~4대 총재는 문화공보부 장관 출신인 이웅희 총재였다. 1988년 3월 28일에 취임해 1992년 5월 27일까지 총 1634일 동안 총재를 역임하다 임기 도중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KBO를 떠났다. 5대 이상훈 총재도 국방부 장관 출신으로 1992년 5월 28일부터 이듬해 9월 16일까지 477일간 총재 자리를 지키다 비리 혐의로 구속되면서 퇴진했다.
심지어 6대 오명 총재는 1993년 11월 26일부터 12월 21일까지 단 26일 동안만 KBO에 머물렀다. 채 한 달도 못 채운 역대 최단기 총재였다.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한 게 사퇴 이유였다. 그 뒤를 이어 받은 권영해 총재 역시 1994년 3월 21일에 7대 총재로 부임한 뒤 278일 만인 그해 12월 23일에 안기부장 자리를 꿰차고 물러났다. 8대 김기춘 총재도 1995년 2월 8일부터 1996년 6월 8일까지 487일간 총재 자리에 앉았다가 국회로 진출하면서 야구계를 떠난 인물이다. 권 총재는 국방부 장관, 김 총재는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다. 이 외에도 경제기획원 장관 출신인 9~10대 홍재형 총재(1996년 7월 4일~1998년 5월 26일)는 사회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국회의원이었던 11대 정대철 총재(1998년 5월 27일~9월 15일)는 112일 만에 비리 문제로 구속돼 역시 물러났다.
이렇게 계속되는 낙하산 인사 속에 KBO의 발전도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3년 임기를 채우는 총재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정치인이 KBO 수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프로야구가 원하는 여러 현안들을 해결하려면 어느 정도 권력에 밀착된 인물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프로야구도 변해 갔다. 많은 야구인들은 점점 힘 센 총재보다 야구와 프로스포츠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인물을 원하기 시작했다.
#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고 박용오 총재
왼쪽부터 6대 총재 오명,8대 총재 김기춘,12~14대 총재 박용오
가시적인 성과도 많다. 박 총재는 프로야구 정규시즌 타이틀 스폰서를 처음으로 유치하고 방송 중계권료를 대폭 인상해 KBO가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 쌍방울과 해태를 각각 SK와 KIA에 매각시키는 데 성공했고, 프리에이전트(FA) 제도 도입, 경찰청 야구단 창단, 도시 연고제 정착 등을 성공시켜 현재 프로야구 운영의 틀을 마련했다. KBO와 대한야구협회의 행정적 통합, 아마야구 지원 확대 등을 일구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업가이자 프로야구 구단주(두산의 전신 OB) 출신답게 최초로 프로야구단 흑자 전환을 지향점으로 삼은 총재이기도 했다. 그룹 경영권 문제를 둘러싼 일신상의 이유로 7년 만에 총재 자리에서 물러난 박 총재는 사퇴의 변으로 “일흔 넘게 살아오면서 KBO에서 지낸 7년은 내 인생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말도 남겼다. 2009년 11월 박 총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야구계 전체가 충격 속에 애도한 표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 총재 이후에는 국회부의장 출신인 신상우 총재(2006년 1월 10일~2008년 12월 16일)가 15~16대, 명지학원 이사장 출신인 유영구 총재(2009년 2월 24일~2010년 5월 2일)가 17~18대 총재를 역임했다. 두 총재 모두 개인사로 두 번째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 또 다른 업적을 쌓아가는 구본능 총재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2011년 8월 제19대 총재로 추대돼 유영구 전임 총재의 잔여 임기를 모두 채웠고, 그해 12월 20대 총재로 재추대됐다. 20대 총재로서의 3년 임기가 모두 끝나가던 2014년 12월에는 3년 4개월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다시 21대 총재를 맡게 됐다. 구 총재의 이번 임기는 2017년 12월 31일까지다. 그때까지 총재직을 유지한다면 총 2324일간 KBO의 지휘봉을 잡게 돼 고 박용오 총재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오래 재임하게 된다.
구 총재가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야구계 일각에서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구 총재의 동생은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LG 트윈스의 구단주다. 특정 구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 KBO의 수장이 되면 오해를 살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구 총재는 이미 각별한 야구 사랑으로 유명했다. 총재가 되기 전인 2005년에 개인적으로 소장한 야구 사진들을 모아 ‘한국야구 100주년’ 사진전을 열었고, 개인 재산을 들여 장충 리틀야구장을 보수했을 정도다. 경남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야구선수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실제로 구 총재는 KBO 지휘봉을 잡은 뒤 많은 공을 남겼다. 가장 큰 성과는 단연 10개 구단 제체를 확립한 것이다. 제9구단 NC와 제10구단 kt의 창단을 차례로 이끌어 냈다. 광주와 대구를 비롯한 야구장 신축과 리모델링을 유도했고, 구장 관리 지침도 만들었다. 또 야구발전기금 300억 원을 조성해 초등학교 야구팀 창단시 3000만 원, 중학교 야구팀 창단시 1억 5000만 원, 고등학교 야구팀 창단시 4억 원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실제로 효과도 톡톡히 봤다. 무엇보다 2011년 161개에 불과했던 전국의 야구장 수는 구 총재 재임 기간 동안 크게 늘어 이제 400개 돌파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훗날 한국 프로야구의 르네상스를 함께 한 총재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배영은 스포츠 자유기고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들 살펴보니 승부조작 스캔들로 판사 출신이 초대 총장에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메이저리그의 수장 자리는 1921년부터 지금까지 랜디스를 포함해 총 10명만이 거쳐 갔다. 과거 3년 임기도 제대로 못 채운 총재들이 수두룩했던 KBO리그와는 달랐다. 물론 오래 버텼다고 해서 다 좋은 커미셔너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메이저리그의 3대 커미셔너이자 스포츠 기자 출신이었던 포드 프릭은 1951년부터 1965년까지 15년간 재임하면서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오히려 물의는 일으켰다. 1961년 뉴욕 양키스의 로저 매리스가 홈런 61개를 때려내 베이브 루스의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자 “루스는 156경기 시절, 매리스는 162경기 시절에 각각 기록한 홈런이니 매리스의 기록에는 따로 표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팬들의 비난을 받은 것이다. 또 1970년 원로위원회에서 스스로를 명예의 전당에 추대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대 최고의 커미셔너로 인정받는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9대 커미셔너인 버드 셀릭이다. 셀릭은 1992년부터 23년간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이끌면서 숱한 업적을 남겼다. 재임 기간 동안 양대 리그를 세 개의 지구로 나누고 와일드카드 제도를 시행하는 현재의 틀을 갖춰 메이저리그의 흥행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몰고 왔고, 인터리그 제도와 비디오 판독 시스템을 도입했다. 1994년 파업으로 월드시리즈가 취소되는 위기를 겪은 뒤에는 선수노조와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긴밀하게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후 단 한 차례의 노사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빼어난 조정 능력을 보였다. 자체 방송국인 MLB 네트워크를 설립한 것도 메이저리그의 수익을 극대화한 성과로 꼽힌다. 현재는 셀릭의 후임으로 2014년 8월 10대 커미셔너로 선출된 롭 맨프레드가 메이저리그를 이끌고 있다. 맨프레드는 코넬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노동과 고용법 전문 변호사 출신이다. 지난해 1월 임기를 시작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