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숫자 집착…눈치 보기냐 소신이냐
이주열 한은 총재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민간 경제연구소들이 2%대를 예상한 것과 달리 3.0%로 제시했다. 배경 사진은 한국은행 건물.
지난 14일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3.0%로 제시했다. 석 달 전 3.2%에서 0.2%포인트 하향 조정한 것으로, 정부가 내놓은 3.1%보다 조금 낮은 수치다. 경기 하강 추세를 고려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셈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장에서는 우려가 쏟아졌다. 부정적인 반응이 나온 이유는 한은이 정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포기한 ‘3’이라는 숫자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3%대 성장’에 집착하는 정부의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3%대 경제성장률은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물론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조차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내놓은 상태다. 가장 후한 점수를 준 현대경제연구원이 2.8%를 예상했고, 한국경제연구원 2.6%, LG경제연구원 2.5% 등 민간연구소의 전망치는 대부분 2% 중후반대다. 모건스탠리와 씨티그룹 등 6개 투자은행(IB)의 전망치도 평균 2.6%를 점쳤다.
그나마 KDI가 한국은행과 같은 3.0% 성장률 전망치를 내놨지만 실제로는 2%대가 될 것임을 실토한 상태다. KDI는 중국 등 신흥국 성장세 둔화와 미국 기준금리 인상 여파가 맞물리는 등 대내외 여건이 좋지 않을 경우 2.6%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KDI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악재인 중국 경제 둔화와 미국 금리 인상을 전제로 깔아둔 것을 고육지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국책기관이다 보니 정부의 3%대 성장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빤히 보이는 예측 결과를 외면할 수도 없어 절충안을 택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주열 총재와 한국은행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정부 편들기라고 성토하고 있다. 정부와 보조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뢰가 최우선인 중앙은행의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국책은행으로서 정부정책을 뒷받침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중앙은행은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신호를 주는 것이 최우선적인 임무”라면서 “한은이 독립성을 보장받는 것도 눈치 보지 말고 소신을 밝히라는 이유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주열 총재도 할 말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3.0% 성장률을 발표하면서 “성장률을 전망할 때 경제적 이외 고려는 단연 없었다”면서 “대외 여건이 안 좋다 보니 민간기관은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택했지만 세계 교역 증대와 저유가 효과 등을 고려하면 3.0%가 낙관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은 입장에서는 나름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지난해에도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장률을 높이 잡았다가 1년 내내 전망치를 수정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지난해 1월 3.7%를 제시했던 한은은 4월 3.4%, 7월 3.3%, 10월 3.2% 등 전망치가 나올 때마다 수치를 떨어뜨렸다.
사실 이 총재가 성장률과 관련해 과감하지 못한 것은 한은의 위상과도 관련이 깊다. 한은이 3% 이하의 성장률을 제시한다는 것은 “정부가 3% 성장을 포기했다”는 선언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이 총재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민간 경제연구소 고위 간부는 “원 오브 뎀(One of Them)인 민간 연구소와 한은의 전망치는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면서 “한은이 3%를 고수한다는 것은 정부에 경기부양 의지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경제주체들에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전했다.
이 총재의 딜레마는 경제성장률 전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금융권은 물론 기업과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 운용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기준금리 결정 역시 고민거리다. 한국은행은 1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연 1.5%로 유지키로 결정했다. 지난해 7월 이후 7개월째 동결이다. 이번 금리 동결은 예견된 것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망이 엇갈린다.
우선 국내외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총재가 조만간 금리인하를 단행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많다. 특히 외국계 투자자들은 상반기에만 최대 두 차례 기준금리 인하가 있을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중국발 금융 불안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갈 조짐인데다 내수와 수출도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다. 우리 정부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경기부양을 위해 추가 금리 인하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다.
하지만 이주열 총재는 금리인하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총재는 1월 금융통화위원회가 끝난 뒤 금리 인하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췄다고 기준금리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경제 관련 전망치는 경제 여건의 변화에 따라 함께 바뀌는 것”이라고 답했다.
문제는 미국이 지난 연말 무려 9년 6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우리나라에도 금리 인상 압력이 밀려들고 있는 것. 미국 금리 인상이 한국은행 총재를 고민에 빠뜨리는 이유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자금이 대거 빠져나가 미국으로 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린다는 것은 경기 회복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여기에 미국이 금리를 계속 올려 한국(1.5%)보다 높아지면 외국인투자자들은 한국에서 돈을 빼내 미국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다. 미국 경제가 잘 돌아가는데다 금리까지 한국보다 더 얹어주는데 수출 부진과 북한의 핵실험 등에 노출된 한국시장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이렇다 보니 이 총재는 기준금리를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미국과 금리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올려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주열 총재는 ‘매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 이 총재가 처한 상황으로 봐서는 물가보다 경기부양과 미국 금리가 더 중요한 시점이다. 평소 소신대로 행동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조건이 많은 이 총재가 고민스러운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