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좌서 물러나 ‘집안 어른’ 노릇만
장성택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가 피살설 등 각종 루머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택에 머물며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0년 7월 26일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해 돌고래 묘기를 구경하는 김정은 제1위원장, 부인 리설주, 고모 김경희. 연합뉴스
장성택 처형 이후 부인 김경희의 건강이상설과 사망설, 그리고 이를 반박하는 생존설 등 갖가지 상반된 소문들이 지금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며 실제 국정원도 이러한 뜬소문을 대부분 부정하고 있다. 특히 김경희의 사망설에는 조카 김정은과 김설송의 도모 혹은 암묵적 동의에 의한 처형 가능성도 주요한 내용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1일, 국내 주요 일간지 중 한 곳은 다시 한 번 김경희의 피살설을 제기했다. 국내 여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이 기사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김정은 시대 최고의 공안통이자 실세 중 한 명인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이 장성택 숙청 이후 한 대규모 일꾼대회에서 김정은의 불참 통보를 전해 받았다는 것. 그런데 당시 김정은의 불참 이유는 ‘김경희 장례’였고, 김원홍이 경호팀 고위관계자에 문의하니 당시 그 관계자가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는 것이다. 즉 단순한 사망을 넘어 피살의 뉘앙스가 매우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최근까지 김경희의 생존과 근황에 대한 유의미한 내부 정보 몇 가지를 입수했다. 이미 그중 일부는 지난 연재(제1219호,1220호-김씨 일가와 조직지도부1,2)를 통해 전한 바 있다. 당시 연재에서 언급했던 김경희와 관련한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김정일 사망 1주기 행사 이후 2013년 1월경 과로한 탓인지, 아니면 믿음이 무너져 약한 마음을 먹은 탓인지 불분명하지만 김경희는 약간의 뇌졸중 및 그 후유증을 앓았다. 물론 이때 장성택은 앓아누운 김경희에 대한 관심은커녕 사업을 핑계로 애인들과의 엽기적인 행각을 이어갔다. 이는 장성택의 주요 처형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후 김경희는 장성택을 숙청하겠다는 심산을 두기 시작했고, 거의 매일 술로 외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다.
이런 관계로 2013년 장성택의 처형을 전후한 2013년 하반기와 이듬해 2014년 2월경까지 김경희는 건강 악화와 남편의 숙청 관련 일로 인해 줄곧 요양생활을 했었다. 2013년 11월에는 러시아의 한 병원을 찾아 신병치료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온 이후 2013년 12월부터 2014년 4월경까지는 아픈 몸을 움켜쥐고 신세력이라 할 수 있는 조카 김설송과 조직지도부 권력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바로 이때 김경희는 김국태(조선노동당 간부부 부장 겸 중앙위원회 비서) 장례식에 잠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경희는 김정일 시대 원로급 인사들의 힘을 받아 복권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급기야 김설송에 의해 권력에서 배제됐다는 것이 앞선 연재의 요지였다. 물론 김정은도 누이의 행보에 합세한 것은 물론이다.
분명 김설송을 비롯한 북한 내 신세력과의 갈등과 반목은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에도 김설송이 고모 김경희를 도모하거나 극단적인 일을 벌인 일은 절대 없었다. 더더욱 김경희의 병사와 관련한 유의미한 정보는 아예 없었다. 김경희는 앞서 연재를 통해 밝혔지만, 김정일이 사망한 2012년 12월 23일 북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상확대회의에서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으로 일을 했었다.
이처럼 김경희는 김씨 가문의 적통이다. 피살의 명분도 취약하고, 현실적으로 북한 내에서 김경희를 감히 축출할 세력도 없다. 이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돈 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김경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잇겠다. 이는 2014년 6월경 필자가 북한 내부의 소식통을 통해 얻은 정보다. 바로 이때 그의 몸무게가 39kg 정도 될 정도로 건강악화가 심해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일이 있었던 2014년 4월 이후 김경희는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에 머물렀다. 지독한 병마와의 싸움을 이어갔고 치료를 지속했다. 김경희는 이 기간 동안 잠시나마 몸을 추슬렀다. 지병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나마 남편의 숙청 이후 찾아온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서는 다소나마 벗어난 상황이었다.
2014년 5월 말 김경희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사실상 한 차례 복권시도에 실패한 김경희였지만 조직지도부 권력복위에 대한 미련은 여전했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크게 달랐다. 완벽하게 조직지도부를 장악한 김설송은 이미 그에게 있어선 아주 벅찬 상대였다. 다만 김설송도 여전히 원로급 인사들에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김경희를 견제하고 조심했다. 특히 예전부터 김경희와 가깝게 지내던 박봉주 내각 총리와 중앙당 경제관련 김경희 최측근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감시 및 통제했다고 한다.
2009년 6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경희 노동당 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함주군 동봉협동농장 현지지도에 동행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연합뉴스
두 사람의 갈등은 특히 돈 문제에서 부딪혔다. 김경희는 여전히 김정일에게 받았던 36호실 및 39호실 일부 당자금과 999호 자금관리 등을 틀어쥐고 놓질 않았다. 어쩌면 김경희에겐 이것이 마지막 보루였을 터. 이 당시 김설송과 그 측근들은 김경희에게 이를 놓아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실제로 실현되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가 다시 한 번 김경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은 2014년 8~9월 사이였다. 당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경희는 2014년 7월경 중국으로 출국했다고 한다. 그의 발목을 다시금 잡은 것은 역시 건강 악화였다. 김경희는 당시 중국 베이징(北京)의 인민해방군 301병원에 입원했다. 301병원은 중국 내 인사 혹은 친(親)중국 국가들의 국가지도자급 주요 인사들이 이용하는 중국 최고의 병원 중 하나로 꼽힌다.
김경희의 당시 상황은 이전도 그랬지만 아주 심각했다. 당시 이 병원에서 체크한 사안은 좌골 신경계 이상, 내분비 이상, 심장 신경 및 근막염, 간과 신장 복수, 위궤양, 그리고 무엇보다 안질환의 하나인 백내장이 심각했다. 당시 중국 의료진은 김경희에 대해 자국의 3대 제약회사 중 한 곳에서 개발된 신약 투여를 중심으로 특별 치료를 실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곳 의료진 역시 더 이상 치료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진료 결과를 듣고 김경희는 2014년 10월 초경 귀국했다. 다만 치료 과정에서 위궤양과 관련한 부분은 약간의 차도가 있어서 조금씩 식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의료진은 김경희에게 정신적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놨다고 한다.
중국에서 돌아온 김경희의 심리적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김경희 개인의 애초 성격도 불과 같았다. 그는 평소에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부터 선친의 권력 배경을 등대고 북한 내에서 ‘안하무인(眼下無人)’격으로 행동했던 인물이었다. 1990년대 만수대 의사당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위인 고위급 간부들과 회담을 할 때도 김경희는 스스럼없이 담배를 꼬나물고 참석하곤 했다. 이전에도 김경희는 ‘유아독존(唯我獨尊)’격으로 살아왔다. 이러한 김경희의 성격은 조카 김정은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후문이다. 조카를 보필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짜증을 내곤했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된 뒤 김경희의 심리는 더욱 안 좋아졌다고 한다. 어쩌면 이러한 그의 상태가 조카들로 하여금 더 멀어지게 한 배경이 됐을 수도 있겠다.
중국을 다녀온 이후 김경희의 병세는 현재까지 여전히 좋지 못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평양에 돌아온 이후 자택을 찾은 일부 인사들을 잘 못 알아보는 증세도 나타났다고 한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경희에게서 치매증세가 다소 의심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확실하게 크로스 체킹이 된 사안은 2014년 10월 김경희가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의 일이다. 이미 김경희는 김설송에게 당 조직비서 및 조직지도부 부장의 권한을 이전에 사실상 넘겨준 바 있지만 공식적인 사안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이 시기 비공식으로 진행된 정치국 확대회의를 통해 권한을 김설송에게 정식 이양한 것으로 확인됐다.
필자가 김경희에 관한 정보를 마지막으로 입수한 것은 지난해 9월경의 일이다. 이 시기 김경희는 앞서의 모든 권한을 김설송을 비롯한 신세력에 이양한 채 자택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5년 9월 현재 기준으로 김경희는 김정일의 유훈을 이행하고 있다. 이 마지막 유훈 이란 ‘김씨 가문의 일을 봐 달라’는 것이다. 즉, 유훈 1조 5항 ‘모든 자식들과 식구들을 김경희와 김정은이 끝까지 돌본다.’
현재 김경희는 김씨 일가의 고문이자 일종의 상왕 격으로 나름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김씨 일가의 조카와 손자·손녀들에게 자신의 경륜과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옛말이나 관련 조언을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김경희는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 그나마 위장 계통의 상황은 다소 좋아져 연한 음식을 끼니때마다 섭취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지난해 입수한 내부 정보에 따르면 이미 가문의 일을 제외하곤 모든 권좌에서 물러난 김경희는 현재 김정은과 설송 등 조카들과 썩 나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예전의 악감정은 남아있겠지만, 그나마 어느 정도의 관계회복은 됐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