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 가더라도 ‘색깔’ 좀 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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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전 패배 직후 안타까워하는 조재진. 연합뉴스 | ||
물론 월드컵 해외 원정 경기에서 1승1무1패로 승점 4점을 챙긴 성적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적과 관계없이 경기 내용을 보면 한국 축구의 진정한 맛을 보여주진 못했다. 이겨도 비겨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귀국과 동시에 한국을 떠난다. 그가 들고 가는 보따리에는 만만치 않은 수확물이 들어있다. 그러나 물질과 명예는 얻었어도 ‘색깔론’에선 그 또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앞서 말한 축구인 외에도 경기장 또는 경기장 밖에서 만난 축구인들, 해설위원들, 현직 축구 선수 등을 통해서도 ‘아드보카트호’에 대한 쓴소리를 부탁받았다. 그들의 쓴소리를 종합해 본다. 이젠 4년 후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 그들의 쓴소리가 그냥 말하기 쉬운 소리로만 듣지 말고 긴장해서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첫 경기 이틀 앞두고 전술 바꾸는 감독이 또 있을까? 너무나 황당했다. 월드컵 앞두고 선수들의 심리 상태가 극도로 예민한 상태인데 안정을 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전술변화로 선수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경기를 보다가 너무 답답해서 축구협회 고위 임원에게 물어봤다. 도대체 왜 포백에서 스리백으로 바꿨느냐고. 그 분이 하는 말이 불안해서 바꾼 것 같다고 하더라. 만약 한국 감독이 월드컵 이틀 앞두고 이런 행태를 벌였다면 언론에서 가만있었겠는가.”
해설위원 A 씨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경기 전 소신 없는 행동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만약 토고전에서 패했다면 아드보카트 감독의 진로에 중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만큼 어이없는 전술 변화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의 플레이가 경직됐고 갑작스런 전술 변화에 익숙지 않아 여러 차례 실수가 나타났다는 것.
토고와의 첫 승 이후 패배가 확실시됐던 프랑스전에서 1-1로 기사회생하자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아드보카트 감독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웃음과 안도감이 절로 묻어났다. 그러면서 자신은 프랑스 같은 강팀을 상대로 무승부의 결과를 얻어낸 데 대해 아주 만족해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경기 내용을 보자. 한국팀은 전반 내내 슈팅다운 슈팅 한 개 없이 경기를 끝마쳤다. 후반전에선 이전과는 다른 몸놀림으로 이미 체력이 바닥난 프랑스를 공략하며 한 골을 만회했지만 특유의 압박과 골 결정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프랑스전을 지켜본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 씨는 “0-5로 지는 게임이었는데 하늘이 도왔다”고 표현할 만큼 한국팀의 전체적인 경기 내용은 바닥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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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전이 끝나자 축구인들이 아드보호에 대해 그동안 참아왔던 비판을 쏟아냈다. 스위스전 직전의 아드보카트. | ||
아드보카트 감독은 스위스전이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스위스는 23명의 선수 중 19명이 유럽파다. 그러나 한국을 봐라. 몇몇 선수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선수들이 K-리그 출신이다. 우린 스위스에 질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축구인 D 씨는 “그런 현실적인 벽을 넘어 달라고 비싼 돈 들여서 외국 감독 데려온 거 아닌가. K-리그의 수준이 유럽에 비해 떨어진다는 걸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건 이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걸 극복해야만 월드컵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부임 후 9개월 동안 K-리그의 수준 탓만 한 게 벌써 몇 번 째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해설위원 A 씨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일본은 비록 16강에 탈락했지만 자신의 색깔이 어떻다는 걸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나 우린 뭔가. 세 게임을 치르며 선수들의 플레이가 들쭉날쭉하며 희비쌍곡선을 그렸다. 기본기 불안에다 자신감 결여가 이런 결과를 나타냈다. 스위스전에서 보여준 플레이를 좀 더 일찍 나타냈더라면 우린 지금도 독일에 남아있었을 지도 모른다.”
축구인 E 씨는 독일에 온 23명의 선수 중 몇몇 선수들에 대해선 도대체 아드보카트 감독이 그 선수를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그중에서도 핌 베어벡 코치의 강한 입김에 아드보카트 감독이 마지못해 낙점했다는 선수에 대해선 가장 많은 ‘의문 부호’가 붙었다.
“부상에서 채 회복되지 않은 선수였다. 선발했을 때부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실제 경기에서도 우려했던 부분이 나타났다. 아주 중요했던 자리에 판단 착오로 후보로 떠오른 다른 선수의 기회마저 놓치게 했다. 이건 감독만의 문제가 아니다. 코칭스태프도 속 시원히 답을 해줘야 하는 부분이다.”
경기 전날 주전 선수를 확정하는 코칭스태프 미팅에서 감독과 코치들은 서로 언성을 높여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많은 논란을 빚었던 부분이 조재진의 선발 출전이었다. 핌 베어벡과 홍명보 코치는 조재진의 선발을 강하게 원했고 아드보카트 감독은 안정환을 선발로 고집하다가 토고전을 앞두고 코칭스태프의 손을 들어줬다는 게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온 얘기다.
1, 2차전에서 좌우 윙백의 뒷받침 부족으로 고립됐던 조재진은 스위스전을 통해 진가를 발휘했다. 더욱이 조재진은 경기 전날 인터뷰에서 “너무 외롭다. 내가 고립되지 않게 사이드 쪽에서 활발히 움직여 줬음 좋겠다”는 다소 과감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해설위원 B 씨는 언론을 향해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그동안 월드컵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드보카트 감독에 대한 견제를 게을리 했다는 지적이다. 감독이 좀 더 긴장하고 상황 판단을 잘 할 수 있도록 언론에서 매서운 펜 끝으로 아드보카트 감독을 향해 공격의 수위를 높여야 했다는 것.
“이미 다 끝난 마당에 왈가왈부하면 뭐 하나. 제대로 준비할 수 있도록 월드컵 이전부터 자신의 진로만을 챙긴 감독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어야 한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해 준 부분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인터뷰에 응한 축구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 부분이 있다. 바로 한국 선수들의 투혼이다.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잘 싸웠고 최선을 다했다. 아쉽게 16강에 탈락했지만 한국 선수들의 투지와 가능성을 확인했고 2010년을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23명의 태극전사들에게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노버=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