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사나이? 포기 모르는 불사조입니다”
▲ 어두운 과거와 전신화상을 딛고 종합격투기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사는 박현성 관장.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피닉스 박’박현성 씨(38)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복싱 선수로 소년체전에서 우승한 후 아마추어 국가 대표와 프로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복싱 팬들에겐 낯익은 인물이다. 워낙 화려한(어두운 세계에서) 과거를 굳이 숨기지 않으려 하는 까닭에 복싱계나 조폭들 사이에선 박현성 씨의 존재가 불가사의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최근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주제로 한 소설책이 나왔다. 제목도 <소설 박현성>.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인터뷰를 한 뒤 너무나 긴 사연들을 짧은 기사로 정리하기가 무리에 가까울 만큼 힘들었던 ‘불사조’박현성을 만나본다.
박현성 씨에 대한 얘기는 1년 전부터 들었었다. 아는 기자들 사이에서 그의 남다른 인생이 화제를 모았었고 기사화를 위해 직접 그를 만날 계획까지 세웠다가 그의 거절로 물거품이 된 적이 있었다.
결국 소설책을 통해 먼저 만나게 된 실제의 박현성 씨는 낡고 허름한 서울 양평동 지하의 복싱 체육관에서 복싱과 격투기를 접목한‘권도’를 만들어 후배를 양성하고 있는 열정적인 지도자였다. 아직도 이런 체육관이 있을까 싶을 만큼 열악한 환경의 체육관이었지만 서로 뒤엉켜 몸을 아끼지 않는 스승과 제자들의 모습에선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화려한 프로필로 치장한 체육관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끈끈한 ‘뭔가’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낸 기자가 자신을 주제로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현성 씨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그 기자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온 인생을 털어놓을 때 무거운 짐을 하나 둘씩 내려놓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며 웃는다.
“아직 내 나이도 어리고 나와 연관있는 사람들이 모두‘현재 진행형’속에 있는 터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고민이 됐다. 그래도 가급적 진실만을 얘기하려 했는데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까 아들 녀석에게 보여주기가 어렵다. 아들은 내가 교통 사고로 다친 줄 알고 있다. 아빠가 나쁜 짓 하다가 이렇게 된 거 알면 많이 실망할 것 같다.”
▲ 박현성 관장은 제자들을 가르치며‘밤의 황제’시절엔 느껴보지 못한 보람과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고 한다. 가족 덕분에 그는 과거와의 인연을 깨끗이 끊어버렸다. | ||
사연 많은 박 씨의 과거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 봤다.
박 씨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충남 성주, 탄광촌으로 유명한 묵방이었다. 광산촌이라는 특수한 환경, 대부분 인생 막장의 사람들이 모여 들다보니 힘 있는 자만이 살아 남는 조직 같은 분위기였단다. 박 씨는 그런 곳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광산촌 일을 맡고 있어 또래보다는 노름하는 아저씨들과 어울리는 등 자신도 모르게‘악동’으로 자랐다고 한다.
“복싱을 하게 된 건 중학교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자꾸 애들 두드려 패고 다니니까 그걸 건전하게 이용해 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복싱을 하자마자 성적이 좋았다. 소년체전, 전국체전은 물론 84년과 88년 올림픽 상비군으로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다. 그런데‘타이틀’을 달게 되니까 주위의 유혹이 더 거셌다. 국가대표라는 꼬리표가 어딜 가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가족들을 생각해서 조직과는 손을 잡지 않으려고 했단다. 그러나 운동만 열심히 한 선수들이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는‘자리’가 없었다. 지도자 아니면 조직과 연결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지도자에는 관심이 없었던 박 씨는 ‘타이틀’을 이용해서 대천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갖고 있는 조직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나쁜 짓을 해도 나쁜 짓인 줄 모르고 산 삶이었다. 싸움을 밥 먹듯이 했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세상이 우스워 보이는 시절이었다.
“그때 반대파 조직원들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 아킬레스건을 잘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사는 것에 전혀 의미가 없었고 가족들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분신 자살을 기도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박 씨는 눈만 빼놓고 의사들도 도망갈 정도의 전신 화상을 입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며 무려 스물일곱 차례 수술을 받았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문신’이었다. 허구한 날 술로 세월을 보냈다. 가족들에게 왜 날 살렸느냐며 악다구니를 퍼붓기도 했었다. 당시 날 지켜준 사람은 아내 ‘엄지’였다. 고등학교 때 한눈에 반해 납치하다시피해서 같이 살았는데 온갖 험한 꼴 다 보면서도 내 곁을 끝까지 지켜줬다. 온 몸이 까맣게 타서 도저히 사람같지 않은 몰골인 나를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헌신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복수심으로 들끓었다.”
“출소 후 잠시 딴 짓을 하기도 했지만 날 정신차리게 만든 사람은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무덤덤했는데 막상 아이가 생기니까 책임감이 엄습했다.‘이 아이가 커서 아빠 깡패였냐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그때부터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싱 지도자밖에 없었다. 대천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하며 조직원들과는 손을 완전히 끊으려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계속 연락해 왔다.”
그러나 막상 박 씨를 찾아온 조직원들은 허름한 체육관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는 박 씨를 보곤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대천에서‘밤의 황제’로 군림했던 그가 사양길에 접어든 복싱 지도자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못한 그림들이었기 때문.
“건달 생활하면서 좋은 차도 타보고 돈도 원 없이 쓰고 다녔다. 그러나 결국 그런 인생은 불나방 같은 인생이다. 밤은 그렇다 치고 낮에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팔리는지 아나. 무서울 게 없던 삶이었는데 자식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겁이 났다. 다행이 뒤늦게 시작한 지도자 생활이 할수록 재미있었다. 보람, 재미, 감동, 새로운 인생의 묘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박 씨는 3년 전에 직접 이종격투기에도 뛰어들어 선수 생활을 했었다. 스피릿MC대회에서 띠 동갑 이상 차이 나는 젊은 선수들과 겨뤄 4강까지 올랐었다. 지금 그가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권도’다. 복싱과 이종격투기를 접목한 새로운 격투기를 창안한 것이다. 곧 권도 협회를 창설할 예정인데 이미 문광부에 신청을 해 놓은 상태라고 한다.
“아들 장가가는 것까진 보고 죽는 게 내 소원이다. 몸을 많이 다친 상태라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복서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그 종착역에서 한 가지 바람이라면 훌륭한 제자를 만들고 가는 거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마음이 아파왔다. 그가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들, 딸, 그리고 그의 인생을 지켜준 아내와 함께 지도자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으면 하는 마음이‘간절함’을 더해갔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