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 난 희망을 보았다”
▲ 씨름연맹의 영구제명 징계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만기 교수. 오른쪽은 씨름연맹에서 이 교수에게 보낸 공문.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최근 씨름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은 이만기 교수(43·인제대 사회체육과)는 기자가 학교로 찾아간 전날에도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왔다고 한다. 씨름연맹의 김재기 총재가 이만기 교수를 ‘모욕죄’로 고소를 한 탓이다. 명예훼손도, 모독죄도 아닌 모욕죄라? 하여튼 모욕죄와 뜬금없는 영구제명으로 본의 아니게 매스컴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이만기 교수를 만나본다.
아마도 10년 만의 만남인 듯했다. 유명인들의 특징은 굉장히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데도 친숙하고 익숙하다는 점이다. 직접 보지 않아도 이런 저런 사연들로 매스컴을 통해 간접적인 만남을 가진 덕분일 것이다. 솔직히 기자의 기억 속에는 천하장사 이만기보다 ‘아내의 치수를 알아야 한다’는 속옷 광고 모델 이만기의 모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 등 씨름판을 평정했던 그는 은퇴 후에도 대학 교수, TV 해설가 또 정치 입문을 꿈꾸는 예비주자 등으로 다양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최근 ‘친정’이나 다름없는 씨름연맹으로부터 내침을 당했다. 선수들한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영구제명으로 말이다. 은퇴한 씨름인에게 영구제명이란 부분이 어느 정도의 파급 효과가 있는 걸까. 이만기 교수도 처음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왜 나에게 영구제명을 내렸는지 너무 궁금해서 연맹 측에 물었더니 씨름 관계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더라. 씨름 관계자라는 게 너무 포괄적 의미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 선수 부모나 씨름 담당 기자들도 씨름 관계자일 수 있다. 날 영구제명시켜 그들이 득을 보는 게 뭔지 모르겠다. 더욱 분란만 가중시킨 꼴이다.”
이 교수는 무척 답답해했다. 자신에 대한 징계 사유 또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씨름연맹에선 이 교수의 징계사유로 ‘2005년 김천장사대회 때 친목단체인 민속씨름동우회와 함께 허위 사실 유포’와 ‘유사단체인 한국민족씨름위원회 발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씨름연맹의 존립 자체를 부정한 점’ 그리고 ‘언론을 상대로 김재기 총재와 씨름연맹을 비방한 점’ 등이다.
“먼저 김천장사대회 때 내가 김재기 총재를 몰아내자며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부분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니까 법원에서 판결나면 그때 얘기하겠다. 1심에선 무혐의 판정을 받았는데 김 총재가 항고를 해서 다시 재판 중이다. 그리고 한국민족씨름위원회 발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부분도 어이가 없다. 그 단체의 초대 회장은 신도현 회장이다. 발기인이 300명이나 됐고 난 그 발기인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연맹 측에서 제시한 자료를 보니까 내가 한국민족씨름위원회 대표로 발기인 총회에 참석한 것으로 돼 있더라. (여권을 보여주면서)이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난 그 당시 필리핀에 나가 있었고 한달 후에 돌아왔다.”
이 교수는 언론을 상대로 총재와 연맹을 비방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10대, 20대는 찾으려야 찾아볼 수 없는 모래판의 관중들, 대도시-중·소도시를 거쳐 군 단위로까지 내려와 관중 동원조차 힘든 현실에서 씨름이 갈 데까지 갔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부분들은 현역 선수들은 물론 씨름 선수 출신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아픔’이다. 어찌 보면 씨름연맹에선 자신들을 향해 비난의 수위를 높이는 ‘씨름 관계자’들에 대한 불만과 괘씸죄 수위를 높이기보다는 왜 씨름판이 점차 재미없는 스포츠로 인식되면서 지방의 경로잔치로 전락했는지를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인 듯했다.
“씨름 선수들과 씨름인들이 피 땀 흘리고 몸 다치고 병신돼 가면서까지 목숨 걸고 지킨 모래판이다. 이 모래판이 씨름연맹 것인가. 아님 총재 개인의 전유물인가. 그건 아니지 않은가. 씨름 선수들이 노력해서 번 수입으로 봉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씨름을 발전시키고 확대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씨름인들이 없다면 연맹이 존재할 수 있겠나. 욕했다고 비난했다고 트집 잡지 말고 제발 귀도 열고 눈도 열어서 정말 더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 좀 했으면 좋겠다.”
이 교수는 정말 분통이 터지는 듯했다. 오래 전부터 씨름 발전을 위해 마이크만 있으면 씨름이 살아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이런저런 태클에도 꿋꿋이 ‘마이웨이’를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법원의 출두 명령서에 상벌위원회 출석, 영구제명 당한 소감을 묻는 숱한 인터뷰 요청뿐이라고 한다.
“친목 단체인 민족씨름동우회에서 총재 퇴진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당시 가장 앞장서서 총재 퇴진을 주장한 씨름인은 현재 상벌위원회에서 일하는 중이다. 한 사람은 영구제명 당하고 다른 사람은 연맹에서 일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영원한 씨름인일 수밖에 없는 이 교수는 지난 봄 김재기 총재가 자신을 명예훼손에 이어 모욕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하는 일이 발생하자 처음으로 자신이 씨름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큰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1991년부터 대학 강단에 선 이후 지금까지 학교에서 지내는 그로선 골치 아픈 씨름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일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친정’이 몰락하는 걸 지켜볼 수가 없어 보이지 않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쓴소리를 했는데 그에 대해 고소를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니 씨름계 출신이라는 신분에 자괴감이 들었다는 것.
“얼마전 ‘씨름인의 밤’이 열렸다. 올드 스타들이 맞대결을 펼치며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줬는데 사실 이 나이에 웃통 벗고 샅바를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명색이 대학 교수 아닌가. 그래서 난 선수가 아닌 심판을 보겠다고 우겼더니 한 후배가 ‘형님이 안 벗으면 누가 씨름 보러 오겠느냐’고 말하더라. 나한테는 대학 강단보다 씨름이 우선이었다. 공개적으로 보여주기 창피한 몸이었지만 씨름을 위해 과감히 옷을 벗었다. 아무리 떠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이만기를 존재케 해준 씨름을 버릴 수 없었다.”
이 교수는 최근 자신의 일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봤다며 활짝 웃었다. ‘이만기 영구제명’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이지 않는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된 것.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세대라면 젊은이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씨름에 관심을 갖고 연맹을 비난하면서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들을 올렸다. 사실 감동을 넘어 감격했다. 날 지지해서가 아니다. 아직도 20~30대의 세대들 중에는 씨름을 좋아하고 씨름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씨름을 잘 포장하고 디자인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상품으로 개발한다면 씨름에서도 ‘세대 공감’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9월 11일 씨름 동호들과의 합의 후 기자회견을 열어 영구제명에 따른 소견을 밝히겠다는 이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지금까지 선수로 활동할 경우 일본 종합 격투기 측에서 입단 제의를 해온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는 내용이다.
“난 못한다. 씨름 하면 이만기고 이만기 하면 씨름인데 어떻게 다른 종목에 도전할 수 있겠나. 힘들어도 씨름판이 명맥을 이어가려면 선수들이 지켜줘야 한다. 격투기로 무대를 바꾼 후배들의 심정과 상황은 이해하지만 씨름이 사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