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히딩크는 나야 나~’
▲ 포항 파리아스 감독 (●국적 : 브라질, ●취미 : 영화 감상·아이들과 놀기) | ||
성남 일화 김학범 감독이 웃으며 한 말이다. 하지만 그의 농담에는 K리그에 불어닥친 외풍(外風)에 대한 긴장감과 ‘결전의지’가 담겨 있다.
2007년 K리그에서 지략을 펼칠 14명의 감독 중에는 외국인 감독이 3명(포항 스틸러스 세르지오 파리아스, 부산 아이파크 앤디 에글리, FC 서울 세뇰 귀네슈)이나 있다. 지난 1983년 K리그가 출범한 이래 외국인 감독 3명이 동시에 활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1년 이후 국가대표 감독 자리를 외국인 감독들에게 ‘빼앗긴’ 국내 지도자들은 K리그에 불어닥친 외풍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모두들 성남 김 감독과 비슷한 얘기를 한다. 대전 시티즌 최윤겸 감독은 “국내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외국인 감독에게 절대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말한다. 수원 삼성 차범근 감독은 “외국인 감독과 싸울 때는 이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진다”고 전한다.
토종 감독들의 마음 한구석을 답답하게 만드는 ‘외풍 3총사’. 2007 K리그 개막을 맞아 ‘제2의 히딩크’를 꿈꾸는 이들의 면면을 자세하게 살펴봤다.
100점짜리 가장
포항 스틸러스의 세르지우 파리아스 감독은 지난 2005년부터 K리그 사령탑으로 일하고 있다. 파리아스 감독은 ‘호나우지뉴(FC 바르셀로나)를 브라질 청소년대표팀에서 가르친 스승’이란 빛나는 경력을 뽐내며 한국 땅을 밟았다. 브라질 출신 선수는 많지만 감독은 한 명도 없었던 K리그에서 어떤 활약을 펼친 것인지에 대한 주위의 기대를 받으며 지휘봉을 잡았다. 파리아스 감독은 부임 이후 포항을 2005년 5위, 2006년 2위(통합순위)로 이끌며 축구팬들로부터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다.
‘삼바의 나라’에서 온 파리아스 감독을 열정적인 남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선입관에 불과하다. 파리아스 감독은 훈련이 끝나면 집에 콕 틀어박혀 열 살 딸, 다섯 살 아들과 함께 놀아주는 ‘100점짜리 아빠’다. 친구나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기보다는 가족과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고 시간이 나면 대구·울산·부산 등으로 여행 가는 걸 좋아하는 ‘모범가장’이다.
친구 같은 아빠이자 자상한 남편인 파리아스 감독은 영화 보는 걸 엄청 좋아한다. 일이 바빠 극장에는 거의 못 가는 편이지만 시간 날 때마다 DVD로 영화를 보며 ‘예술’을 향한 갈증을 푼다. 이런 그를 보며 부산의 한 관계자는 “1년에 300편 정도 보는 것 같다”고 귀띔한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거나 영화를 보는 걸 즐기지만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무작정 달린다. “아무 곳이나 가서 무작정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계속 뛰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게 그의 설명.
▲ 서울 귀네슈 감독 (●국적 : 터키, ●취미 : 새벽까지 자료 분석) | ||
그라운드의 보헤미안
김포 할렐루야와 고양 국민은행 간의 내셔널리그 결승 1차전이 열렸던 지난해 11월. 검은색 배낭을 짊어진 한 외국인이 김포 종합운동장을 찾았다. 청바지를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은 채 관중석에서 경기를 본 그를 부산 감독 에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파리아스 감독이 내성적이라면 에글리 감독은 외향적이다. 그의 취미는 모터사이클 타기다. 한국에서는 타지 않지만 휴가를 보내러 스위스에 갈 때면 거친 굉음을 내며 ‘죄민수’처럼 도로 위를 누빈다.
에글리 감독은 부산에 온 뒤 ‘삶의 낙’을 포기했다. 아직 한국에서 취미를 즐길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서 모터사이클을 탈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기 책상 앞에 놓인 K리그 우승 트로피 사진을 가리키며 “이걸 얻고 나면 부산에서 모터사이클의 시동을 걸겠다”고 말한다.
왕년에 술 좀 마셨던 에글리 감독은 지금은 술을 멀리한다. 스위스 대표선수 시절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돼 신문 1면을 ‘장식한’ 끔찍한 기억 때문이다. 에글리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의 치욕이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말로만 나를 따르라고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밖에 없도록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표를 건네고 경기장에 오라고 말을 붙일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인 만큼 그는 여행을 즐긴다. 지금까지 가본 나라가 100개 국을 넘는다.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는 타고난 보헤미안이다.
▲ 부산 에글리 감독 (●국적 : 스위스, ●취미 : 모터사이클 타기(우승 때까지 보류) | ||
냉정과 열정 사이
터키 언론은 지난해 말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자국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세뇰 귀네슈가 서울과 감독 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해가 동쪽에서 다시 뜬다’고 보도했다. 터키어로 귀네슈가 ‘해’(sun)를 뜻하는 것을 활용해 ‘귀네슈 감독이 동쪽(아시아)에서 지휘봉을 잡았다’는 의미로 재치 있는 제목을 뽑은 것이다.
터키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한국에 온 귀네슈 감독은 ‘제2의 고향’에서 지도자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울 생각이다. 터키에서는 웬만한 것을 다 이룬 만큼 각별하게 여기는 한국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자신의 축구철학을 마음껏 펼치려 한다. 이에 대해 그의 한국어 통역을 맡는 시난 오즈투르크 씨는 “귀네슈 감독은 잠시 머물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니다. 5~6년 이상 머물며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감독님은 자신을 터키 대표로 생각한다”며 “서울을 아시아 최고이자 세계적인 클럽으로 키워서 팬들로부터 ‘터키 지도자가 최고’라는 평가를 받길 꿈꾼다”고 덧붙였다.
야망을 품고 한국에 온 만큼 귀네슈 감독은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한다. 유럽식의 강도 높은 체력훈련으로 서울의 ‘하드웨어’를 한 단계 높이려고 한다. 또 새벽 3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 다음날 선수들에게 가르칠 선진축구 강의내용을 정리한다.
‘독한 모습’을 보인다고 귀네슈 감독을 차가운 승부사로 단정하는 건 옳지 않다. 훈련장 밖에서는 온화한 미소로 선수들을 대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시난 씨는 “귀네슈 감독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분이다. 경기장과 훈련장에서는 카리스마를 내세워 선수들을 장악하지만 평상시에는 아버지처럼 인자하다”고 전했다.
낯선 땅에서 지휘봉을 잡는 감독들은 때때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귀네슈 감독은 “연장자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포함해 한국과 터키 문화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며 한국생활에 대해 어떤 어려움도 내비치지 않았다.
귀네슈 감독이 한국문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음식문화다. 해안도시인 터키 트라브존에서 태어나 해물요리를 좋아하는 귀네슈 감독은 “한국에 온 뒤 맛좋은 해물탕, 생선, 회를 실컷 먹게 됐다”며 환하게 웃는다. “한국음식이 맵다고 들었는데 아주 맛있다”며 입맛을 다신다. 시난 씨는 귀네슈 감독이 한국에 와서 ‘천국의 맛’을 찾았다고 귀띔한다. 귀네슈 감독이 각종 반찬을 밥에 넣고 김으로 둘둘 마는 김밥이라는 별미를 먹을 때마다 행복해 한다고 빙그레 웃는다. 선수 개개인의 면면은 훌륭하지만 그걸 하나로 묶지 못해 정상정복에 실패했던 서울. 귀네슈 감독은 지금 김밥을 만드는 것처럼 서울 선수들의 장점을 한데 모으려 한다.
전광열 스포츠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