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도 스승도 그라운드에선 양보 못해!
▲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4강 진출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소속팀 일본 가시와 레이솔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 후 새로운 팀을 알아보기 위해 절치부심했지만 LA갤럭시행은 절친한 친구 홍명보와 ‘더블 캐스팅 후보’임을 알고 자진 사퇴했고, 터키 트라브존 스포르 입단도 계약서 사인 직전에 약속된 내용과 틀리다는 이유로 그가 먼저 박차고 나왔다. 그 후 ‘영원한 스승’인 이회택 감독의 부름에 전남에 몸을 맡겼지만 계속되는 부상으로 대표팀 은퇴와 현역 은퇴의 수순을 밟고 결국 코치와 축구 유학 등의 과정을 밟게 된다.
언뜻 보면 엘리트 코스만을 거친, 고생이란 단어와 상관없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의 축구인생은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그가 입은 ‘옷’은 ‘기성복’이 아닌 딱 몸에 피트되는 ‘맞춤복’처럼 보인다.
부산 아이파크 신임 감독 황선홍(40). 언젠가는 맡을 자리였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은퇴 후에도 축구장을 떠나지 못했는데 덜컥 팀을 안고 보니 예상했던 고민과 예상치 못했던 숙제들로 인해 밤잠을 설치기 일쑤라고 한다. 지난 17일 부산 아이파크 클럽하우스에서 ‘초짜’ 황선홍 감독을 만났다.
엄살 ┃ 살이 쏙 빠졌다. 선수 시절보다 더 여윈 모습에 “요즘 잠을 못 자느냐?”고 묻자, “잠 잘 시간이 어딨냐? 경기 비디오 보다 보면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라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너무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것 같아 기자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던졌다. “부산이 지난 시즌 13등 했는데 무슨 걱정인가. 앞으로 올라 갈 일만 남지 않았느냐.” 이 얘기를 듣고 있던 황 감독은 “올라갈 수도 있지만 14등 할 수도 있죠. 선배들이(다른 팀 감독들) 고생해서 순위를 안고 있는데 우리한테 쉽게 그 자리를 내주겠어요?”라며 엄살을 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보단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단다. 선수들의 성향이 파악되고 구단 운영에 대해 알게 된 후론 땀을 흘린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도전 ┃ 전남의 수석코치로 있다가 갑자기 코치직을 사퇴하고 영국 유학을 결정했을 때 당시 황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영국에) 갔다 왔는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지만 그래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멋진 멘트를 남겼었다. 그 얘기를 꺼내자, 황 감독은 “나한테 (감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해가 아닌 내년쯤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영국에 있을 때 다른 팀으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때가 아닌 것 같아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부산측의 제의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고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1년, 2년 지나 저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내려진다고 해도 후회 안 할 거예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경기 결과를 놓고 댓글도 많이 달릴 거고 언론의 비난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수 있어요. 냉정한 평가와 엄중한 심판을 받을 생각이에요. 제 축구 인생이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충분히 이겨낼 자신있습니다.”
친구 ┃ 또 다시 ‘이분’ 이름이 등장한다. 홍명보 코치. 황 감독도 ‘알아서’ 얘기를 꺼냈다. 지난 번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홍명보 코치가 올림픽대표팀 감독 자리를 놓고 설왕설래를 빚었던 부분에 대해 “난 그 당시 세대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 황 감독도 비슷한 생각을 내비쳤다.
“(감독으로서) 테이프를 끊는다는 게 참 많이 버거워요. 제 나이를 전후로 해서 대표팀 출신이 프로팀 감독을 맡은 게 처음이잖아요. 제가 잘 해야 젊은 지도자들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부담이 생기더라고요. 감독되고 나서 이런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네가 잘 해야 우리가 산다’라는…. 명보나 전 항상 앞에 있었어요. 앞에서 새로운 걸 개척하는 입장이었죠. 그러다보니 이런 일에 익숙하기도 하지만 매번 처음 겪을 때는 마음이 무거워요.”
황 감독은 유학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코치 경험이 많다고 해서 좋은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책임감있게 역할 수행을 담당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경험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봤다.
▲ ①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터키와의 3, 4위전을 마친 후 황선홍과 히딩크 감독이 팬들을 향해 고별인사를 하고 있다. ② 2005년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활약했던 모습. 친근한 선배 같은 모습으로 선수들에게 존경 받았다. ③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SBS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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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애기같은’ 질문이죠. 명보와의 사이를 모르고 묻는 질문 같았어요. 누가 먼저 감독을 시작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전 명보랑 동업자 정신이 있어요. 한국 축구가 발전하려면 누가 누구를 밟고 올라서는 게 아니라 같이 발전해야 해요. 대표팀도 중요하고 클럽팀도 중요해요.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죠. 그러나 명보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계속 대표팀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프로팀에 들어올 생각이 있다면 빨리 오라고요. 홍명보와 황선홍이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페어플레이를 펼친다면 팬들이 얼마나 즐거워하겠어요.”
김호, 김정남, 차범근 박항서 감독 등은 황 감독의 스승들이다. 감독과 선수에서 감독 대 감독으로 대결을 펼치는 상황들이 초보 감독으로선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운동장에서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한때 그분들 밑에서 축구를 배우고 성장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다르잖아요. 저야 오히려 마음이 편하죠. 처음이니까. 그래서 어깨의 짐 내려놓고 편하게 맞붙고 싶어요. 깨지면서 배워야죠 뭐.”
후배 ┃ 황 감독을 인터뷰할 시기가 한창 안정환의 진로 문제가 부각될 때라 화제는 자연스레 안정환으로 옮겨갔다.
“저야 정환이가 오면 너무 좋죠. 마케팅 차원이나 팀 전력 면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더욱이 저랑 정환이는 대표팀에서 같은 포지션을 뛰기도 했고 평소 나름 절친한 선후배라고 생각한 탓에 정환이가 진로 문제로 마음 고생하는 걸 보면서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언론에서 자꾸 정환이를 ‘돈만 아는 선수’로 몰고 가는 게 마음 아파요. 제가 아는 한 정환이가 그렇게 막힌 사람이 아니거든요.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것 같은데, 중요한 건 정환이의 선택이에요. 선택의 책임도 정환이가 지는 거고요.”
안정환 영입과 관련해서 구단의 입장은 이미 정해졌지만 앞으로 협상의 여지는 더 있을 거란 말로 안정환에 대한 미련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던 중 황 감독 옆에 놓여 있던 한 스포츠 신문이 눈에 띄었다. 1면 헤드라인 제목이 ‘조재진 삼세판’이었고 해외 진출을 노리는 조재진이 풀럼FC 입단 테스트를 받기 위해 출국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 제목을 흘끗 쳐다보던 황 감독이 “이런 선수가 우리 팀에 와야 하는데…”라며 아쉬움을 한껏 드러낸다.
“괜찮은 선수를 데려오고 싶어도 몸값이 너무 비싸요. FA 선수들 중 웬만한 선수들은 이적료 포함해서 10억 원대가 넘어요. 연봉은 문제 안돼요. 이적료가 비싸서 그렇지. 전 요즘 선수들 몸값 비싼 거 이번에 실감했어요.”
황 감독의 얘기를 듣던 기자가 “본인도 선수 시절 비싼 몸값의 소유자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황 감독은 “제가 뭐가 비싸요? 일본에 가서야 좀 받았지 한국으로 다시 들어올 때는 이적료도 없었어요”라면서 손사래를 친다.
“물론 선수들 몸값이 오르는 건 찬성이에요. 많이 받으면 좋은 거죠. 그러나 대표팀에 한두 번 갔다 오면 팀에서 경기를 뛰지 못하는데도 수억 원 대의 연봉을 받더라고요. 월드컵이 정작 선수들 실력보단 연봉만 올려놓은 것 같아서 씁쓰레할 때가 있죠.”
목표 ┃ 부산 아이파크의 사령탑을 맡은 황 감독은 대표팀 최종 엔트리도 아닌 50명의 예비 명단에 소속팀 선수의 이름이 한 명도 없었던 부분에 대해 자존심 상해했다.
“다 우리 새끼들인데, 어떻게 자존심이 안상하겠어요. 어떤 기자는 허정무 감독님이 K리그 구단을 방문하실 때 대표팀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 부산엔 안 오신 줄 알더라고요. 정해성 코치님과 같이 오셔서 만났어요. 비중있는 팀으로 만들어야죠. 제발 이 선수 좀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받는 팀으로 만들고 싶어요. 주전들이 다 (대표팀에) 뽑혀서 선수 구성에 어려움을 토로할 만큼 잘 나가는 팀이 돼야 축구가 재밌지 않겠어요?”
인터뷰 말미에 황 감독은 “이제야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속내를 비쳤다. 유학 생활도 많은 도움이 됐고 독일월드컵 때 축구 해설위원도 잊지 못할 추억거리지만 은퇴 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은 지금의 자리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게 내 옷이죠. 딱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거죠. 이제 멋만 내면 되는데…, 선수들이 그 멋을 낼 수 있게끔 도와줄 거예요. 하하”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