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아내 앞에서 어깨 펼 수 있어요
▲ 취중 진담 8일 압구정동 한 식당에서 만난 봉중근. 국내에 복귀한 뒤 어려움, 메이저리그와 국내리그의 차이점 등을 취중토크를 통해 진솔하게 털어놨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시원한 외모만큼이나 소주잔을 거침없이 들이킨 봉중근은 남다른 솔직함과 유쾌함을 내세우며 시종 분위기를 주도했다. 다음날 WBC 대표팀 출정식이라 1차에서 ‘간단하게’(?) 끝냈지만 유니폼 입은 선수, 봉중근한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인간적인 친근함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 연봉협상의 어려움
봉중근의 2007년이 암흑이었다면 2008년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메이저리거 출신으로 한껏 기대를 모았던 한국 복귀 첫 해에 6승7패, 방어율 5.32로 시즌을 마무리하자 봉중근한테는 ‘봉미미’라는 별명이 붙었다. ‘미미한 선수였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난 시즌 직구 구위를 올리고 컨트롤이 안정되면서 LG의 제1선발 노릇을 톡톡히 해냈고 시즌 11승에 방어율 2.66, 탈삼진 140개로 ‘닥터 K’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덕분에 별명도 ‘봉미미’에서 ‘봉타나’로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스토브리그에서 봉중근은 공 던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연봉 협상!
“한국에선 에이전트가 아닌 선수가 직접 구단과 연봉 협상을 하잖아요. 돈 문제를 놓고 구단 관계자와 얼굴 붉히며 얘기를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어떤 선수는 200만 원, 300만 원 더 올리려고 구단 측과 설전을 벌여요. 선수 입장에선 ‘각’이 안 서는 거죠. 저 또한 지난 시즌 연봉이 1억 원이나 깎이면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선수로서 대우받고 운동하려면 연봉은 에이전트가 해야해요. 프로축구는 그게 가능한데 왜 야구는 (에이전트의 연봉 협상이) 안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봉중근이 11승을 올리고 올해 받아낸 연봉은 처음 국내로 유턴 후 받았던 연봉 3억 5000만 원에서 1000만 원 더 오른 액수다. 지난해 성적 부진으로 1억 원이 깎인 터라 처음 연봉을 보전받는 선에서 마무리됐지만 봉중근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모양이다.
# 미국에서 한국으로 턴!
1997년 신일고 3학년 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에 입단한 봉중근은 10년 만인 2006년 5월 LG트윈스로 돌아왔다. 미국 야구에 대한 애착이 워낙 강했던 탓에 국내 복귀를 놓고 심하게 고민을 했다는 봉중근은 남편의 한국행을 반대하는 아내와 일주일 넘게 냉전을 벌이다가 결국 아내의 항복 선언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미국에 있을 땐 제 어깨가 지금처럼 좋아질 거라곤 꿈도 꾸지 못했어요. 그냥 ‘내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싶었죠. 그때 LG로부터 러브콜이 오더라구요. 에이전트를 맡았던 형이 고생하는 제 모습을 보다 못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했어요. 저 또한 며칠 고민을 했는데 저보다 아내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죠. 결국 아내가 두 손을 들면서 조건을 걸었어요. 허락은 하지만 절대로 후회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더라구요. 알았다, 고맙다 하고 돌아왔는데 첫 해에 죽을 쒔잖아요. 정말 창피했어요. 제가 이 정도로 못할 줄 몰랐거든요. 구단이나 선수들한테 무척 미안했고 괜히 왔다 싶기도 했어요.”
봉중근은 지난 시즌 국내로 유턴 후 자신의 전철을 밟았던 서재응과 김선우에 대해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솔직히 두 형들은 잘할 거라고 믿었어요. 전 재활하다가 복귀한 거고, 재응 형이나 선우 형은 한창 공을 던지다 돌아온 데다 대학 때 이미 한국 야구에 대한 경험을 넓힌 터라 쉽게 적응할 줄 알았어요. 인터뷰할 때마다 ‘그 형들은 잘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살짝 당황스러웠죠. 그래서 그 후론 형들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면 ‘적응 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라는 멘트로 바꿨어요(웃음).”
신일고 1학년 때 봉중근은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광주일고와 맞붙은 적이 있었다. 당시 상대팀 투수가 김병현. 김병현은 평균자책점 0.2점대, 1경기당 20탈삼진 등 놀라울 만한 기록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는데 이날 타자로 나온 봉중근과 맞서 처음으로 1실점하는 아픔을 안게 된다. 당시 봉중근은 4할대를 치는 타격왕이었다.
“지금도 타자에 대해선 미련이 아주 많아요. 처음 미국으로 간 것도 타자를 할 줄 알고 갔던 거였는데…. 추신수가 잘하고 있는 걸 보면 참 인생 재밌어요. 신수는 투수로 갔다가 타자를, 전 타자로 갔다가 투수를 하잖아요. 신수 하는 걸 보면 막 방망이를 잡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려요. 하루는 구리에서 훈련하다가 김용달 코치님께서 스윙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양상문 코치님께서 몸 다친다고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조용히 있다가 양 코치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공이 야구장 담장을 넘어가는 거예요. 그후 김 코치님이 선수들 모아놓고 한소리하셨대요. ‘니네들은 뭐하는 거냐?’고(웃음). 이상하게 전 방망이를 잡으면 마냥 행복해져요.”
지난 시즌 성적이 좋지 않자, 잠시 타자로의 전업을 고민했었다는 봉중근. 은퇴하기 전에는 반드시 마운드가 아닌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로 선수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띄운다.
WBC 대표팀에서 마운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봉중근은 김인식 감독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박찬호와 이승엽의 대표팀 불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찬호 형이나 승엽 형이나 이번 시즌이 너무 중요하잖아요. 특히 승엽 형은 지난해 너무 못했기 때문에 올해 뭔가를 꼭 보여줘야 하는 절박함이 있거든요. 굳이 대표팀에서 뛰지 않아도 해외에서 좋은 성적 올리면 국위선양하는 거 아닌가요? 찬호 형도 그동안 대표팀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뛰셨구요. 두 선배들의 몫을 후배들이 잘 해내야 될 것 같아요.”
해외에서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선배들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옮기다 박찬호에 대해 재미있는 내용을 들려줬다.
“찬호 형을 대표팀에서 처음 만난 날이었어요. 전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인사를 했는데 대뜸 하시는 말씀이 ‘봉중근 선수, 식사하셨나요?’ 하고 묻는 거예요. 후배한테, 그것도 잘 아는 후배한테 너무 깍듯하게 말을 높여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하긴 (류)제국이랑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찬호 형이 악수를 하시며 ‘처음 뵙겠습니다. 전 박찬호라고 합니다’라고. 제국이도 당황했었겠죠? 후배한테도 처음엔 결코 말을 놓지 않으세요. 그래서 후배들이 많이 어려워하는 편이었죠. WBC 1기 때 찬호 형의 이런 모습에 후배들이 거리를 두자 나중엔 찬호 형이 직접 후배들 방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봉중근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하기 전 고려대 입학이 예정된 상태였다. 메이저리그 무대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이중계약 파문을 일으키면서까지 미국행을 강행했었다. 그 후유증으로 다사다난한 일들이 펼쳐졌다. 이 일에 대해 봉중근은 이런 코멘트를 달았다.
“그땐 후폭풍이 장난 아니었죠. 그런데 무엇보다 맞아가면서 운동은 못하겠더라구요. 야구하면서 엄청나게 맞았어요. 바지에 피가 범벅이 될 때까지 맞은 적도 있어요. 대학 가서도 그렇게 맞으면서 야구할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더욱이 고려대에는 (최)희섭이 형이 있었거든요(웃음).”
최희섭과 절친한 봉중근은 미국에서 최희섭을 만날 때마다 “내가 형한테 맞기 싫어 미국으로 도망쳤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며 활짝 웃는다.
# 웰컴! 진영과 성훈
지난 시즌 타선의 부진으로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친 경험이 많은 봉중근은 이번에 FA 이진영과 정성훈이 LG에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절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고 한다. 더욱이 두 선수는 봉중근과 같은 80년생들. 이진영과 대표팀에서 만나 우정을 나눈 봉중근은 ‘빵빵한’ 동기들의 가세로 올시즌 LG의 타선이 간단치 않을 것임을 자신했다.
“기사에도 나왔듯이 LG는 80년생들이 잘해야 팀이 살 수 있어요. 어느 때보다 책임감이 막중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즌을 앞두고는 동계훈련을 엄청나게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배터리를 맡고 있는 (김)정민 형까지 걱정하시더라구요. 너무 쉰 거 아니냐고. 그런데 선배들한테 물어보니까 괜찮다고는 하시는데 솔직히 조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에요. WBC 때문이라도 페이스를 빨리 끌어올려야 하는데 어쩌나 싶고. 하지만 어깨가 아프지 않아 앞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소주 2병이 최고의 주량이라는 ‘선수’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한두 잔 원샷을 하는 사이, 어느새 빈병이 4개로 늘어났다. 선수도 기자도 ‘알딸딸’해진 기분을 맛보고 있을 때 봉중근은 뜬금없이 가장 사랑하는 후배라며 김광현, 류현진에 대한 감상을 털어 놓았다.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후배들이에요. 광현이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200%는 되는 것 같아요. 한가운데로 직구를 던져도 얼마나 자신있게 피칭을 하는지 몰라요. 아무리 큰 대회라고 해도 긴장하는 법이 없구요. 현진이는 능글능글하죠(웃음)? 베이징올림픽 때 같이 방을 썼는데 체격이 큰 데도 말투는 영락없는 ‘애기’예요. ‘형, 그랬는데요~’하고 말꼬리 올리는 것도 그렇구. 그런데 마운드에만 올라가면 무표정이야. 그게 멋지더라구요. 아, 참! 이건 재밌는 올림픽 일화인데 이대호랑 (이)승엽 형이랑 같은 아파트를 썼거든요. 그런데 대호나 승엽 형이 오락게임 마니아들이에요. 서로 지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타입이라 새벽까지 잘 생각을 안 해요. 내일 게임이니까, 우리 금메달 좀 따야 하니까 제발 잠 좀 자라고 해도 안 자요. 그래도 메달 땄으니까 다행인 거죠(웃음)?”
어느새 ‘과거’가 돼 버린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추억담은 지면으로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차고 넘쳐났다. 올림픽을 통해 태극마크의 소중함을 새삼 절감했다는 봉중근은 WBC 출전에 대해 각오를 되새겼다.
“프로야구가 연말에 이런저런 일들로 뒤숭숭했잖아요. 일본은 한국을 이기려고 최고의 멤버들을 뽑고 최첨단 기계로 선발 투수들을 분석한다는데 우린 좋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혼란스러웠어요. 지켜보는 마음이 조금은 조급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준비를 잘 해서 국민들이 보여준 야구에 대한 열정과 응원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두 살 된 아들과 4월에 세상 빛을 보게 될 또 한 명의 ‘봉중근 주니어’를 둔 아빠이자 가장이지만 WBC를 앞둔 ‘봉타나’ 봉중근의 가슴엔 물결치는 태극기가 깊게 자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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