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소녀들, 이젠 군인 아닌 외국인 품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정보부와 장교클럽이 있던 렉스 호텔 전경. 사진제공=다큐멘터리 사진가 류기남
마제스틱 호텔에도 미군이 드나들던 장교클럽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맥심클럽(Maxim’s Club)이 있습니다. 전쟁 당시 미군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클럽입니다. 직원 안내로 맥심클럽 안으로 들어가봅니다.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변했지만 아직도 중앙 무대에선 저녁에 전통쇼가 열린다고 합니다. 2층에도 댄싱클럽이 남아 있습니다. 식당 안에는 많은 중국계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한국, 미국, 일본, 러시아 사람들도 많이 온다고 합니다. 저도 베트남산 커피를 한 잔 시킵니다. 그리고 뮤지컬 ‘미스 사이공’(Miss Saigon)을 생각합니다. 지금 보았던 장소들이 전쟁 당시 미스 사이공의 ‘산실’이었기 때문입니다.
1975년 4월 30일. 남부 베트남 대통령궁으로 북부 베트남군 탱크가 철문을 밀고 들어오며 길고 긴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사이공이 함락된 것입니다. 붉은 깃발이 게양되며 통일이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당시 미국 대사관 옥상에는 미군 헬기가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철수하는 모습이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4년 후. 영국 런던 뮤지컬 거리에서는 무대에 실제 헬기가 등장해 떠나는 뮤지컬이 공연되었습니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아이콘 레아 살롱가. 첫 출연 당시 17세였다.
한창 전쟁 중이던 70년대, 사이공의 한 클럽에서 미스 사이공을 선발하는 대회가 열립니다. 여기에 참가한 여성은 모두 술집 아가씨들. 이름만 대회지 사실은 미군들에게 인기 있는 아가씨를 뽑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경쟁하는 아가씨들의 꿈 자체가 이미 비극의 시작입니다. 50년대엔 우리 한국의 이야기이고 70년대엔 베트남의 아픈 이야기입니다. ‘미스 사이공’은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양의 여인은 아이를 그에게 맡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공통된 줄거리입니다.
레아 살롱가(Lea Salonga). 이 뮤지컬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필리핀 가수이자 배우입니다. 뮤지컬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영국 제작진은 17세 미혼모 ‘미스 사이공’을 찾기 위해 영국과 미국을 다니며 오디션을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다 이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프랑스 TV에서 방영된 필리핀 영화에서 노래하는 한 소녀. 그녀가 바로 레아 살롱가였습니다. 오디션 첫날, 작곡자 미셸 쇤베르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른 노래 ‘Sun and Moon’. 지금까지 많은 배우들이 여주인공인 킴을 노래했지만 레아 살롱가를 뛰어넘진 못했습니다. 그만큼 팬들은 17세 살롱가의 흐느끼듯 감미로운 노래를 인상깊게 기억합니다. 그 소녀는 지금 40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음에도.
10년 전 호찌민시 댄싱클럽내 풍경. 사진제공=다큐멘터리 사진가 류기남
가까운 메콩 델타지역에는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벽부터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논밭으로 나가야 하는 소녀들이 ‘엄마처럼 살진 않겠다’며 호찌민시로 흘러들어옵니다. 이 나라는 아직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습니다. 정부의 허가하에 이주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밤업소의 일입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는 제1의 경제도시지만 한편으론 ‘밤의 문화’도 번창해 가고 있습니다. ‘미스 사이공’처럼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미혼모도 이제 이상하지 않다고 합니다. 과거 전쟁 당시에는 군인들이었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 나라말로는 ‘꽁메오’입니다. 고양이란 뜻입니다. 외국인과 결혼해 살거나 떠나는 여성들도 많이 있습니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예술일 뿐입니다. 여긴 다른 현주소가 있습니다. 베트남 여인들은 절대로 떠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진 않습니다. 자기 아이를 다른 부인이 키우는 것을 참지 못하는 강한 모성애가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남편과 헤어지면, 먼저 아이를 데리고 와 베트남에 두고 한국 가서 이혼합니다. 우리 현지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엄마 호적에 올리니 이중국적이 되고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남편은 눈물을 삼키며 돌아가지만 양육비는 계속 보내야 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사랑. ‘미스 사이공’의 슬픔은 변질되었을 뿐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