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모 “코마네치가 얼마나 이쁘던지” 유인탁 “다리 하나보다 금메달이 중요했다”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 후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 그들은 올림픽 무대에서 메달을 획득했을 때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의 히어로들을 만나 그때 그 얘기를 들어본다.
#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건국 이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으로 국민들에게 감동의 쓰나미를 선물했던 양정모(63·희망나무 커뮤니티 이사장).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당시 은메달은 몽골의 제베긴 오이도프, 동메달이 미국의 진 데이비스였다.
현재 부산에 거주 중인 양정모는 몬트리올 올림픽을 추억하면서 자신의 금메달 획득보다 올림픽에서 만났던 체조 요정 코마네치를 잊지 못했다. 몸이 가냘프고 어여쁜 루마니아 소녀는 당시 선수촌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모았다고.
양정모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나뿐만 아니라 몬트리올 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남자 선수들은 코마네치를 좋아했다. 당시 한국에는 컬러 TV가 없었다. 올림픽 가서 처음으로 컬러 TV를 구경했다. 선수촌 휴게소에서 체조 경기를 중계하는데 컬러 TV로 보는 코마네치의 연기는 진짜 예술이었다.”
스포츠에서 ‘최초’라는 단어는 종종 등장하지만 ‘건국 최초’라는 수식어는 흔치 않다. 양정모는 그 수식어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말한다.
“최초의 올림픽 챔피언의 타이틀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살아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은퇴 후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내 이름을 도용해 사기를 친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건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답게 멋지고 폼나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늘 존재했다.”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양정모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출전, 2연패에 도전하려 했지만 당시 동서냉전으로 인해 한국은 이 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양정모는 선수 생활 은퇴 후 조폐공사에서 지도자로 새 출발했지만 IMF로 인해 팀이 해체되는 안타까움을 경험한다. 그 후 양정모는 카메라와 사진에 심취해 여행사진작가로 활동했고 ‘희망나무 커뮤니티’란 봉사 단체를 만들어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고 있다.
# 휠체어 타고 시상대 오른 유인탁
양정모 이후 레슬링은 대표적인 ‘효자 종목’으로 올림픽에서 꾸준히 메달을 생산해냈다. 그중 1984년 LA올림픽 68kg급 자유형 금메달리스트 유인탁(58)은 경기 중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상식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예선전에서 허리를 다쳤고, 마지막 결승전에서 무릎이 돌아가는 부상을 당했지만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집념과 투혼을 보이며 마침내 그는 LA올림픽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최근 서울 강남에서 기자와 만난 유인탁은 올림픽 결승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결승전 장소가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였다. 상대가 미국의 앤드류 라인이다 보니 관중들 대부분이 일방적으로 자국 선수를 응원했다. 그때 대회 관계자가 이런 얘길하더라. ‘앤드류 라인이 금메달 못 따면 그게 기적’이라고. 몸 상태나 전력, 관중들 응원 등 상대 선수가 나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다. 난 8강에서 허리 부상을 당한 게 계속 좋지 않아 시합에 나서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물리치료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추슬러 결승전에 나섰다. 경기가 시작되니까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함성이 쏟아지더라. 모두가 ‘USA’를 외치며 발을 구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난 ‘제발 한 방만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경기를 풀어갔다.”
유인탁은 LA올림픽에서 휠체어 타고 시상대 올라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경기는 시합 종료 10초 전, 5-5 동점을 이뤘다. 레슬링은 동점으로 끝나면 더 큰 기술을 사용한 선수가 이기게 돼 있다. 앤드류 라인은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내려고 종료 10초 전에 유인탁의 왼쪽 다리를 꺾었는데 순간 우두둑 소리가 들릴 정도의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다리 하나 끊어지면 어때, 난 다리 하나 잃어도 꼭 금메달 따고 말 거야’라며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그렇게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기술이 앞선 내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순간엔 흥분한 나머지 다리 부상을 생각지도 못하고 매트를 돌며 세리머니를 펼쳤는데 매트에서 내려가는 순간 내 다리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결국 휠체어를 타고 시상식에 가선 진행요원의 부축을 받고 제일 높은 시상대에 올랐다.”
84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한 유인탁은 이후 전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인기 스타로 급부상했다. LA올림픽 이후 은퇴를 선언한 유인탁은 대한주택공사와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 후 회사로 들어가 직장인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운동만 해오던 선수가 갑자기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고. 이후 식당을 하는 등 개인 사업을 하다가 최근엔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봉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고3 여고생이 올림픽 은메달 획득, 농구 성정아
1984년 LA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리스트 성정아(50)는 고3 신분으로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표팀 막내였지만 올림픽 무대에서 주전 파워포워드를 맡아 6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는 실력을 뽐냈다. 특히 중국과의 풀리그 최종전에서 박찬숙과 함께 완벽한 더블 팀, 박스 아웃을 펼쳐 ‘괴물 트윈타워’ 천웨팡(210cm)과 정하이샤(204cm)를 무력화시키고 공격에서도 13득점을 올리면서 대한민국이 중국을 상대로 69-56 승리를 거두고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거머쥐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현재 수원 영생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를 맡고 있는 성정아는 중국과의 준결승전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이상하게 그날은 나를 비롯해서 언니들 컨디션이 다들 좋았다. 반면에 중국은 평소 하지 않던 실수를 연발했고, 경기가 진행될수록 중국을 잡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2미터가 넘는 장신인 천웨팡의 팔꿈치에 맞아가면서 밀착 수비를 펼쳤고, 중국 선수들이 하프라인을 넘지 못하게 몸을 날렸다. 그런 움직임이 신장에서 절대 우세를 보인 중국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 같다.”
성정아는 고3 여고생이던 1984년 여자농구 대표팀 주전 파워포워드로 LA올림픽에 출전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여자농구대표팀을 이끌었던 조승연 감독은 당시 한 인터뷰에서 LA올림픽 중국전 최고의 선수는 대표팀 막내 성정아라고 지목했을 정도다.
“다른 경기보다 중국전은 꼭 이기고 싶었다. 그동안 언니들이 중국을 만나 수차례 뼈아픈 패배를 경험했는데 다른 대회도 아닌 올림픽에서 그 한을 풀기 바랐다.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 벌어지니까 처음엔 꿈만 같더라. 경기 끝나고 언니들과 부둥켜안고 엄청 울었다. 지금도 그때 경기 영상을 보면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성정아는 이후 ‘여자농구 최초의 억대 스카우트’ 주인공이 돼 동방생명(삼성생명)에 입단한다. 당시 성정아를 데려가기 위해 태평양, 현대, 동방생명이 ‘전쟁’ 수준의 물밑싸움을 벌였다는 후문이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1992년 은퇴 후 숙명여대에 입학했던 성정아는 당시 연애 중이던 이윤환 감독(고려대-삼성전자-현재 삼일상고 체육교사 겸 농구부 감독)과 결혼식을 올렸고, 1997년 수원영생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발령받은 후 19년째 한 학교에서 체육을 지도하고 있다.
# 5회 연속 올림픽 출전, 사격 이은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격 50m 소총 복사 부문 금메달리스트 이은철(49). 1984년 LA올림픽을 시작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한국 선수 최초로 5회 연속 올림픽 출전자인 그는 올림픽 금메달 1개, 세계선수권 금메달 2개,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4개, 아시안게임 금메달 5개를 획득한 그랜드슬램의 기록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와 사격을 병행했던 이은철은 2000년 은퇴 후 이은철은 사격을 놓고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던 장점을 살려 실리콘밸리로 들어갔다. 정보기술(IT)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이후, 실리콘밸리테크·인텔라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실리콘밸리의 빅데이터 전문기업 ‘트레저데이터’의 한국 지사를 맡고 있다. 이은철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결선에 모두 8명이 뽑혔는데 난 8명 중 꼴등으로 간신히 결선에 들어갔다. 그땐 8등도 감사했다. 이미 4년 전인 88서울올림픽에서 처절한 패배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엔 마음을 비우고 내 총에만 집중하자고 결심했다. 난 총 10발을 쏠 때까지 8kg이나 되는 무거운 총을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질 않았다. 실핏줄이 터져 수십 개의 멍이 들 정도였지만 사격감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 발을 쏜 뒤에야 총을 내려놨다.”
사격의 이은철은 한국 선수 최초로 5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다.
합계 점수 105.5. 최고의 점수를 받아낸 이은철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오히려 허탈한 마음이 생겨 당황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4년 전의 난 사격에서 만큼은 내가 왕이라고 생각했다. 4년 후의 난 세상을 돌아보고, 나보다 잘하는 선수를 인정하고, 금메달보단 과정을 중시하려 했다. 마음을 비우니까 갖고 싶었던 금메달이 생기더라. 선수라면 인생에 한번쯤 ‘그분’이 오시는 걸 경험하는데 그때가 딱 그런 날이었다. 바람의 방향부터 나랑 혼연일체가 됐다. 내가 총을 쏘면 어디 맞힐지 다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이후 두 차례 더 올림픽 무대에 섰지만 이은철은 금메달을 따고 나서부턴 사격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끝으로 그는 총을 내려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만약 내가 미국에서 공부와 사격을 병행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 직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선 공부와 사격을 병행할 수 있었고, 내가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던 게 은퇴 후 컴퓨터 관련 일을 하게 만들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컴퓨터 관련 세일즈를 하다가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던 이은철. 사회인으로서 쓴맛과 단맛을 모두 맛본 후 지금은 빅데이터 관련 회사 한국 지사장을 맡고 있지만 그는 언젠가 사격 세계로 돌아가 지도자로 서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셔틀콕 여왕’ 방수현 “저 보고 싶었죠? 리우에서 보아요” 미국 텍사스 주를 벗어나 3시간 정도를 내달리면 만나게 되는 루이지애나 주 슈리브포트(Shreveport). 고급 주택가들이 즐비한 동네를 따라 들어가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저택 앞에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멈췄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인지 집주인이 차를 보고 맨발로 뛰어나온다. “어서오세요. 세상에 여기까지 취재를 오시다니”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방수현(46)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별, 수지 수산티의 그늘에 가려 방수현은 늘 ‘세계 2인자’로 불렸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단식 결승전에서 맞붙은 숙적 수산티. 1세트를 11-5로 따내며 기선을 제압했지만 2세트는 수산티의 노련미에 눌려 5-11로 패했다. 3세트마저 범실이 겹치는 바람에 3-11로 내줘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셔틀콕 여왕’ 방수현은 리우 올림픽 해설위원으로 시청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준결승에서 방수현은 수산티를 통쾌하게 꺾는다. 결승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의 미아 아우디나마저 이긴 방수현은 시상대에서 양쪽으로 인도네시아 선수들을 세우고 경기장 가득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수지 수산티는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의 라이벌이었다. 내가 금메달을 따려면 그 선수를 반드시 물리쳐야만 했다. 그때는 수산티 이름만 들어도 민감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런 라이벌이 존재했기 때문에 내가 배드민턴 단식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방수현한테는 애틀랜타올림픽이 금메달 외에도 인생의 배우자를 만나게 한 대회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올림픽 동안 어머니의 주선으로 당시 애틀랜타에서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일하던 신헌균 씨를 소개받은 것이다. “그때는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부상이 겹치면서 은퇴를 앞당겼고, 결국 은퇴하자마자 곧장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게 지금에 이른다. 아들 하랑이와 딸 예랑이 엄마로 사는 삶이 행복하지만 가끔은 배드민턴이 그립기도 하다.” 방수현은 현재 올림픽이 열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가 있다. MBC-TV 해설위원으로 방송을 통해 인사를 드릴 예정이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