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 에로 대명사? 70년대엔 ‘김두한’ ‘시라소니’로 활약한 독보적 액션스타
이쯤 되면 누구 얘기를 할 것인지를 알아차렸으리라. 1980~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까지 개그맨들에게 이 배우의 성대모사는 대유행이었다. 특히 인간 제록스란 별명을 가진 최병서가 잘했다. 또 그 시절 학창시절을 보낸 남학생들이라면 이 배우의 표정과 연기 그리고 대사까지 흉내내봤으리라. 흐르는 세월 속에 이제는 원로배우가 된 이대근 얘기다.
<뽕>에서 삼돌역으로 출연한 이대근(오른쪽)이 과장된 표정의 연기를 하고 있다.
이대근은 단단한 신체에 텁텁하고 무척 남성적인 마스크를 가졌다. 이런 외모로 청장년 시절 그는 한국형 ‘마초’를 상징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본명인 이대근도 이런 이미지에 놀랍도록 부합한다. 그의 이름 대근은 한자로 큰 대(大), 뿌리 근(根) 자를 쓰고 있다. ‘큰 뿌리’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는 <뽕>(1985)과 <변강쇠>(1986) 등 에로물에 나왔던 기묘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의 출발은 마도로스 박으로 불린 박노식의 계보를 잇는 액션스타였다. 정극에 이르기까지 연기 스펙트럼도 매우 다양했다는 점에서 이대근은 자신에게 형성된 에로물의 이미지로 인해 배우로서 손해를 본 셈이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현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인 이대근은 1967년 KBS 공채 탤런트로 입사했지만 오랫동안 무명으로 지냈다. 이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김효천 감독의 <실록 김두한>(1974)이다. 이 영화에서 이대근은 김두한 역을 맡았고 흥행에 대성공했다. 이대근표 김두한은 총 네 편이 만들어졌는데 1990년대 <장군의 아들>시리즈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대근은 김두한도 한수 접고 형님으로 모신 시라소니 이성순도 연기했다. 이 영화가 바로 <시라소니>(1979)다. 한 배우가 협객 김두한과 시라소니를 소화한 것은 이대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만큼 1970년대 이대근의 액션 스타로서 아성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당시 유머로 이런 얘기가 회자됐다.
“김두한하고 시라소니가 싸우면 누가 이기지?”, “몰라. 둘 다 이대근이야.”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1970년대는 불세출의 액션 스타 이소룡이 전 세계를 강타하던 시절이었다. 선이 굵은 이미지의 이대근은 이러한 열풍을 타고 한국형 액션을 소화해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췄다. 당시 열악한 국내 영화 현실에서 대역 없이 배역을 소화해내느라 이대근에겐 잔부상이 잦았단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그는 돌연 에로물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이 분야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뽕>(1985)과 <변강쇠>(1986) 영화 포스터.
1980년대 한국영화는 에로물 범람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원인은 국민 우민화를 위해 전두환 정권의 시행했던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정책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대근은 ‘3S’ 정책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이대근은 1980년대에도 간간이 액션물에 출연하긴 했지만 이전 같지 않았다. 폭력 액션물은 오랫동안 침체 상태에 빠졌다가 1990년대 들어 부흥기를 맞는데 김두한의 젊은 시절을 다룬 <장군의 아들>(1990)이 그것이다.
이대근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토속 멜로 <심봤다>(1979),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년)를 통해 불학무식하나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미지의 남성으로 연기변신에 성공했다. 이런 그의 이미지는 <뽕>과 <변강쇠>란 에로물에서 절정에 달한다.
나도향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뽕>은 ‘가세, 가세, 뽕을 따러 가세’라는 이른바 뽕타령이 간간이 깔리는 매우 토속적인 작품이다. 이대근은 이 영화에서 “왜, 나만 안 주냐”며 무턱대고 안협(이미숙)의 몸을 갈구하는 머슴 삼돌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란 비참한 시대에 붕괴되는 성윤리 의식, 그리고 원초적 본능과 물질적 욕구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이 영화를 단순히 에로물이라고 치부하긴 어렵다.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이미숙은 이 영화를 통해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대근은 <변강쇠> 인기에 힘입어 엄종선 감독에게 후속편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역시 힘 세게 생긴 배우 김진태가 <변강쇠 2>(1987), <변강쇠 3>(1988)에 출연했고 옹녀 역은 2편에서도 원미경, 3편에선 하유미가 맡았다.
그러나 이대근이 빠진 변강쇠는 마치 속 없는 만두와도 같았다. 속편들은 1편만큼 인기몰이를 하지 못했다. 이대근은 이와 별도로 만화가 고우영이 감독한 <가루지기>(1988)에서 다시 변강쇠 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역시 변강쇠는 이대근”이라는 말을 회자시켰다. 그 후로도 이대근은 <웅담부인>(1987), <호걸 춘풍>(1987), <됴화>(1987), <고금소총>(1988), <대물>(1988), <합궁>(1988), <안개도시>(1989), <창부일색>(1989>, <백백교>(1992)로 에로물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필모그래피를 쌓아갔다.
가장 최근작 드라마 <발효가족>에 출연했던 모습. 출처=JTBC
이대근은 영화와는 달리 TV드라마에선 정극 연기에 집중했다. MBC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는 달동네 하숙집 주인 영감 역을 맡아 많은 찬사를 받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한 차지철 역 전문 배우이기도 했다. 이대근은 <제2공화국>(1989), <제3공화국>(1993), <제4공화국>(1995)에서 차지철 역을 소화해냈다. 가장 최근에 이대근이 출연한 작품은 JTBC 창립드라마 <발효가족>(2011~2012)이다. 이후 더 이상의 작품 출연은 없다. 현재는 후학들에게 연기지도에 열중하고 있다고 한다.
배우로서 형성된 이미지와 실생활의 이대근은 매우 다르다고 한다. 이대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서울 한 교회의 장로로 재직하고 있다. 무척 보수적이고 가정적인 인물로 전해진다. 즉 직업인 연기를 위해 이대근은 자신만의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이다.
이대근은 한국 영화사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대근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영화도 있었다. 코미디 영화 <이대근, 이댁은>(2007)이다. 그는 시대에 따라 카멜레온 같은 변신을 통해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배우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이순재가 80세를 넘어서까지 왕성한 연기 활동을 하듯 이대근도 원로배우로서 영화든 드라마든 다시 화면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장익창 비즈한국 기자 sanbada@bizhank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