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함상명이 중국선수 손 들어준 까닭은?
2016 리우올림픽 태권도 동메달리스트인 이대훈이 8강전에서 요르단의 아흐마드 아부가우시에게 8-11로 패한 뒤 인터뷰를 통해 전한 메시지다. 이번 올림픽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이대훈의 8강전 패배는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대훈은 슬퍼하기보단 상대의 승리를 축하하며 큰 박수를 보냈고, 이에 감탄한 중계 해설진은 “이거야말로 진정한 올림픽 정신”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이번 올림픽에선 유독 ‘올림픽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무궁무진하다. 비록 금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금메달 이상의 가치를 발휘한 대표팀 ‘보물’들 얘기를 살펴본다.
배드민턴 여자복식에서 동메달을 딴 정경은(뒤쪽)-신승찬. 연합뉴스
한국 배드민턴은 배드민턴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이후 지난 런던올림픽까지 매 대회마다 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리우올림픽 전까지 금 6개, 은 7개, 동 5개로 18개의 메달을 챙겼다. 정경은-신승찬을 제외한 남자 여자 혼성 복식 4개 조가 8강에서 무릎을 꿇었고, 단식 손완호도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계 랭킹 1위인 이용대-유연성 남자 복식의 준결승 진출 좌절이 뼈아팠다. 그런 가운데 정경은-신승찬이 감격적인 동메달로 한국 배드민턴 대표팀에 숨통을 트이게 해준 것이다.
정경은은 2012 런던올림픽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 4년 전 올림픽에서 김하나와 복식을 이뤘던 정경은은 당시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왕샤올리-위양 조와 맞붙어 2-0으로 승리한다. 그러나 정경은과 김하나는 실력으로 그들을 이긴 게 아니었다. 왕샤올리-위양이 자국의 텐칭-자오윈레이를 만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지는 경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한국의 하정은-김민정도 져주기 게임을 벌였다가 세계배드민턴연맹으로부터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선수 8명이 실격당했고, 정경은도 그에 포함됐다.
정경은은 이후 대한체육회로부터 국가대표 자격정지 1년을 받고 졸지에 승부조작 선수로 분류됐다. 1년이 지나 자격정지가 풀리면서 정경은은 원래 장예나와 짝을 이뤄 복식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성적이 좋지 않아 1년 전에 파트너를 교체한 대상이 신승찬이었다. 정경은-신승찬은 리우올림픽에서 생애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힘든 길을 걸어온 두 사람에게 메달 색깔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리우올림픽에서 한국 탁구의 단비 같은 존재로 떠오른 정영식. EPA/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정영식의 성장은 한국 탁구에 단비 같은 존재로 꼽힌다.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세계랭킹 1위인 마룬을 만나 두 세트를 먼저 빼앗고도 세트스코어 2-4로 역전패했던 그는 16일 남자 단체 준결승에서도 중국 에이스 장지커를 상대로 접전을 벌인 끝에 2-3으로 패했다. 이어 동메달결정전 1단식에선 독일 바스티안 슈테거를 3-2로 이기고 이날 출전한 한국 선수들 중 유일한 승자로 떠올랐다. 비록 생애 첫 올림픽 메달을 눈앞에서 놓쳤지만 그는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나는 주세혁의 뒤를 이어 한국 남자 탁구의 간판스타로 입지를 굳힐 전망이다.
정영식은 2011년 미래에셋대우에 입단 이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국제 대회만 나가면 맥을 못 췄다. ‘국내용’이란 꼬리표를 떼기 위해 정영식은 ‘연습벌레’로 불릴 만큼 훈련에 몰두했다. 2015년 호주오픈 탁구 단식에서 정영식은 생애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한 달 뒤엔 코리아오픈 남자단식 결승에서 선배 주세혁을 꺾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정영식의 장점은 세계 톱랭커들을 상대해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경기를 풀어간다는 사실이다. 거침없는 선제공격과 견고한 백드라이브는 상대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탁구인들이 왜 이번 올림픽보다는 4년 후 도쿄올림픽을 기대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지난 16일 리우올림픽 남자 사이클 옴니옴(프랑스어로 다양한 자전거 경기를 의미) 경기 중 한국의 박상훈은 영국의 마크 캐번시디와 충돌하면서 크게 넘어졌고, 곧장 병원으로 후송됐다. 캐번시디가 레이스 도중 추월을 시도한 박상훈의 앞을 가로 막는 바람에 충돌이 생긴 것이다. 이후 캐번시디는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시상식 이후 인터뷰에서 박상훈에 대한 사과를 전하지 않아 SNS가 그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기도 했다. 이후 캐번시디는 영국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상훈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고, 박상훈과 직접 통화를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박상훈은 캐번시디를 원망하기보단 자신이 주로를 급변경한 잘못이 크다며 자세를 낮췄다. 엄청난 땀과 노력을 더해 올림픽 무대를 밟은 그가 자신의 경기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오죽했을까. 그러나 박상훈은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이며 캐번시디를 끌어안았다.
남자 복싱 밴텀급 16강전에서 함상명(오른쪽)이 중국 장자웨이에게 3 대 0 판정패 당한 뒤 장자웨이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복싱은 원래 올림픽 본선 티켓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56㎏급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아르헨티나 선수가 올림픽을 포기하면서 함상명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함상명은 4일 전 베네수엘라의 빅토르 로드리게스를 맞아 2-1 판정승을 거두며 좋은 컨디션으로 장자웨이를 맞이했다.
함상명이 장자웨이를 상대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년 전 인천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장자웨이와 맞붙었고, 그땐 함상명이 3-0 판정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 측에선 심판의 홈 어드밴티지가 심했다고 항의에 나섰다. 함상명도 인터뷰에서 “실력으로 이긴 경기는 아니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정도였다. 리우올림픽 16강전에서 다시 만난 장자웨이. 함상명은 0-3 판정패를 당한 이후 장자웨이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들어줬다. 아마도 2년 전 자신이 거둔 승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이었으리라.
한편 18일 오후 올림픽을 마치고 귀국한 여자 핸드볼대표팀의 수문장 오영란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브라질을 떠나오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면서 “그 미련과 아쉬움 때문에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됐다”는 말로 답답한 속내를 토로했다. 오영란은 임영철 감독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8년 만에 대표팀으로 복귀했다. 메달 색깔에 관계없이 후배들에게 꼭 메달을 걸어주고 싶었던 그는 충격의 예선전 탈락으로 모든 꿈을 접어야만 했다.
“올림픽이 끝날 때까진 이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 것 같다. 가족들과 보내면서 힘들었던 시간들을 잊고 재충전하고 싶다. 그 이후에 제대로 인터뷰하자.” 은메달2개와 동메달 1개를 갖고 있는 오영란이지만 그는 후배들에게 ‘선물’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구기 종목 참패 선배들의 생각은? “김치찌개 먹이고 메달 따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 여자배구가 메달 획득에 실패한 후 다양한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포효하는 김연경. 연합뉴스 여자 핸드볼 ‘우생순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오성옥은 이번 리우올림픽에 KBS 해설위원의 자격으로 브라질을 찾았다. 매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선수들과 희로애락을 공유했던 그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대표팀의 예선 탈락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였다”고 설명했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이번 대표팀 선수들의 전력이 이전에 비해 조금 떨어진 면은 있었지만 기본기를 충실히 다진 선수들이라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선 탈락은 상상도 못했고, 최소한 동메달은 갖고 가겠다고 봤는데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왔다. 후배들이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섰다.” 오성옥은 이번 대표팀의 최고령 선수이자 ‘엄마 선수’였던 오영란 우선희의 간절함이 다른 선수들한테선 찾아볼 수 없었다는 얘기도 전했다. “마지막 스웨덴전에서 오영란과 우선희의 절박한 표정을 보며 해설 중에 울컥했던 적이 많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안 먹고, 점수를 내려 했다.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나는 선수들인데 다음엔 이들 없이 어떻게 경기를 치르나 싶을 정도로 걱정이 앞선다.” 오성옥은 한국 특유의 저돌적이고 빠른 공수 전환이 실종됐다고 지적한다. “내가 올림픽에서 뛸 때도 유럽 선수들의 신장과 체격은 상당했다.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 위축되지 않고 경기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우리만의 빠른 핸드볼을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선 한국의 색깔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장이 큰 선수들만 갖다 놓으면 뭐하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는데.” 오성옥은 4년 후 지금과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색깔에다 유럽식 핸드볼의 장점을 덧입히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연경이 고군분투했던 여자배구도 메달 획득에 실패한 후 다양한 문제들이 지적됐다. 그중 불안한 리시브로 원성을 많이 샀던 박정아에 대해선 도 넘은 비난으로 시끌벅적했다. 이를 지켜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나는 작은 새’ 조혜정 전 GS칼텍스 감독은 박정아가 욕을 먹을 일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정아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한 포지션에서 제대로 키우지 못한 지도자 잘못이다. 우린 올림픽에서 뛴 선수들에게 비난할 자격이 없다. 배구인들이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후배들에게 좋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줬고, 그런 환경에서 배구를 하다 보니 가슴 아픈 결과를 안게 된 것이다. 협회와 연맹이 서로 밥그릇 싸움 하지 말고 대표팀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언제까지 예산 부족을 이유로 선수들을 홀대할 것인가. 김치찌개 먹여가며 메달 따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깊이 반성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4년 후 우린 똑같은 실수와 안타까움을 반복할 것이다.” 조혜정 전 감독은 이번 올림픽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준 김연경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 “우린 김연경이 혼자이고, 상대팀은 김연경 같은 실력의 선수가 두세 명 이상이다. 거기서부터 싸움이 안 되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여자 배구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도 예산 부족으로 아우성들이다. 지원 없이 희생만 강요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린 4년 후에도 비슷한 아픔을 반복할 거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조 전 감독의 얘기가 귓가를 맴돌고 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