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손’ 무시하다 ‘1%’에 울 수도
▲ 지난 21일 김지하 시인(오른쪽)을 만난 손학규 전 지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는 지난 14년 동안 같은 판(한나라당)에서 화투를 쳤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돈도 많이 땄다(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 지사, 대통령 후보 반열 등).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상 최대의 판돈이 걸린 큰판(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질 것 같으니까 화투판을 확 엎어버린 것 아닌가. ‘도박하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군정 잔당, 개발독재 잔재 세력)이라는 말만 남기고 자기는 화투판을 떠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이제 새로운 도박판이 필요하다’(중도세력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실험에 나서겠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 정치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아름다운 패배’를 볼 수 있을까.”
지난 3월 19일 한나라당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의 탈당 소식에 당직자들이 토해낸 말들은 비난을 넘어 분노에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분노는 손 전 지사 개인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에 그치는 정도였다. 한나라당은 ‘지지율 5%’의 손 전 지사가 탈당한 것에 대해 ‘별것 아니다’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그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다. 아직 대선이 많이 남아 있으니 잘 수습만 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지난 1997년 대선 국면에서 이인제 의원은 탈당 직전 지지율이 20%를 훌쩍 넘고 있었다. 그만큼 파괴력이 있었다. 하지만 손 전 지사는 지지율도 높지 않기 때문에 탈당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한나라당의 판단은 지금까지 공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한나라당 지지율은 물론,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나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율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는 점도 손 전 지사의 탈당을 ‘가볍게’ 보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분위기도 감지된다. 손 전 지사의 탈당에 대해 “당의 나쁜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며 매우 걱정스런 모습이다. 최악의 경우 ‘손학규도 망하고, 한나라당도 망하는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일각에서 우려하는 한나라당을 괴롭힐 수 있는 망령은 어떤 것일까.
먼저 당의 단일 대오가 깨지면서 신화처럼 굳게 믿고 있던 정권 재창출에 대한 확신에도 의문부호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집권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동반하고 있다. 사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내 최대 이벤트인 경선을 잘 치르기 위해 후보들만 분열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 어떤 변수가 있어도 99% 집권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 ‘1%’의 변수가 터져 버린 것이다. 강재섭 대표는 “도대체 손 전 지사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탈당 선언할 때까지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며 손 전 지사에 대한 강한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싸움에 임할 때 승리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여기에 손 전 지사의 한마디가 한나라당 관계자들을 더욱 배신감에 떨게 했다. 그는 탈당하면서 한나라당을 ‘군정 잔당, 개발독재 잔재 세력’으로 규정해버렸다. 이는 향후 대선 구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선거 전문가들은 2007년 대선도 지난 2002년 대선처럼 ‘51% 대 49%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런 만큼 누가 중도세력을 견인하느냐에 따라 간발의 차이로 당락이 가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이 지금과 같은 높은 지지율을 계속 유지하고 간다고 해도 막상 대선에서 ‘한나라당 대 비 한나라당’ 구도로 싸움이 전개되면 손 전 지사가 탈당한 뒤 만들어갈 비 한나라당 세력이 결정적인 장애물이 될 거라는 전망도 불안감을 더한다.
사실 ‘손학규가 빠진’ 한나라당은 이념적으로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손 전 지사의 존재로 중도세력도 아우르고 있다는 명분을 쥐고 갈 수 있었지만 그의 탈당으로 수구 보수세력이란 낙인이 더욱 공고하게 찍히게 됐다. 그런데 이는 북미 관계의 개선과 함께 찾아온 한반도 냉전 체제 종식이라는 새로운 정치 환경에서는 매우 ‘불편한’ 이념적 스펙트럼이다. 한나라당이 최근 유연한 대북기조를 강조하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오히려 일관성 결여라는 역공을 받고 있는 것도 운신의 폭을 넓히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 한나라당 천막당사 이전 3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염창동 당사에서 열렸다. 원희룡 의원, 박근혜 전 대표, 강재섭 대표, 이명박 전 시장(왼쪽부터)이 옛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천막당사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현재 손 전 지사의 탈당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많은 게 사실이다. 빅 투에 대한 지지율도 크게 변화가 없다. 여권의 ‘손학규 죽이기’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양상이어서 손 전 지사의 정치 장래는 그리 밝지 않다는 게 대체적 전망이다.
하지만 여권에서 유력 후보가 계속 뜨지 못한 채 대안이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 손 전 지사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만약 그가 중도개혁세력을 아우르는 제3 세력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나가 ‘제2의 노무현 바람’을 일으킨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당에서는 ‘5%의 사나이’였지만 밖으로 나간 뒤 30%를 만드는 유력 대권 주자로 성장한다면 당내의 상실감과 심리적 공황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질 수도 있다. 그 결과 한나라당의 중도 지지세력이 동요를 일으키며 이명박 전 시장 지지에서 손 전 지사 지지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나라당 빅 투의 연쇄적인 지지율 하락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은 당내 경선 흥행도 쉽지 않을 것으로 우려한다. 손 전 지사가 이탈함으로써 삼각 구도가 아닌 양강 체제로 치러지게 돼 다양한 연대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특히 경선 국면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손 전 지사의 ‘보수-개혁’ 동맹을 이뤄 ‘이명박 대세론’을 깰 가능성도 사라졌다. 그의 탈당으로 한나라당은 ‘하이라이트가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야만 한다. 한나라당에서는 벌써부터 “‘뻔한 결과’를 재밌게 볼 시청자가 얼마나 될까”라며 경선 흥행 실패를 걱정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한나라당의 높은 지지도는 ‘중도’ 이 전 시장과 ‘보수’ 박 전 대표의 양강 구도에 ‘개혁’을 표방하는 손 전 지사가 있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정립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손 전 지사의 이탈로 ‘보수-개혁’의 싸움이 아니라 ‘보수, 그들만의 전쟁’으로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한반도에 평화 해빙 무드가 조성됨에도 빅 투는 여전히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다는 이미지가 고착돼 경선 흥행도 더욱 어렵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궁여지책으로 원희룡 의원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미운오리새끼’로 취급받던 원 의원은 최근 달라진 당내의 ‘대접’에 조금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3월 22일 서울 염창동 당사에서 천막당사 이전 3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강재섭 대표는 “원희룡 고진화 의원은 천막당사를 짓기 전에 먼저 다른 곳에서 천막당사를 지은 적이 있다”며 두 주자를 치켜세우는 듯한 발언을 한 바 있다. 또한 ‘새정치수요모임’ 대표인 남경필 의원과 이 모임 소속 김명주 의원이 원 의원 지지를 선언했다. 한나라당이 손 전 지사의 빈자리를 원 의원으로 대체하려는 모습이다. 원 의원은 당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내 개혁세력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고 말하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원 의원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경력이나 중량감에서 손 전 지사에 견주기 어려운 만큼 당내 경선이 ‘빅 투’로 구도로 고착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 중진 의원은 “원 의원이 최고위원까지 지냈지만 손 전 지사와 같은 당내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당 색깔과 맞지 않는 행동과 정책을 내놓은 점은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당내에서는 홍준표 의원과 김태호 경남도지사, 오세훈 서울시장 등까지도 또 다른 경선 조커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얘기만 오갈 뿐 구체적 움직임은 없다.
현재 한나라당은 손 전 지사 탈당에 대해 그렇게 우려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지지율 5%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밖에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를 놓친 한나라당으로서는 역풍이 휘몰아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대공황에 빠져들 수도 있다. ‘제2의 이인제’를 막지 못했다고 한탄하면서.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