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쉼표 하나, 그곳에 콕~
세계 곳곳과 국내 구석구석을 다닌 친구이기에 감회가 남다를 것입니다. 이 사진들을 보며 지난 시절들이 떠오릅니다. 울릉도는 저의 부친께서 살던 곳입니다. 어머니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이 섬으로 혼자 이주하여 평생을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제겐 추억이 많습니다.
울릉도 태하 해안.
울릉도는 너무 먼 곳이지만 저는 대학졸업 무렵 교생실습을 거기로 갔습니다. 아버지를 보기 위해서였지요. 고등학교에선 교생이 처음 왔다고 운동장에서 조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과 함께 읽은 애너벨리, 예이츠의 시들. 돌아가던 날 부두로 나온 여학생들이 손수건을 흔들며 울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휴가철이 되는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직장 시절. 중간간부인 저는 사표를 내고 아주 긴 휴가를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맞는 깊은 슬럼프입니다. 저는 직업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떠난 곳이 울릉도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다보니 아버지 인생이 참 기구합니다. 어린 5남매를 낳고 키우다 아내가 갑자기 떠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마치 죄인인 양 낯선 섬으로 와 자식들을 위해 오징어 건조업을 하며 살게 되기까지. 아버지는 전쟁 시절 평양에 가장 먼저 진격한 사단의 소대장 출신입니다. 많은 부하들을 지휘해본 사람입니다. 인생은 참 애매하며 불투명합니다. 정확하게 가려 해도 부정확해집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언제 떠날지 모릅니다. 원하는 직업이 있어도 엉뚱한 일을 합니다. 그게 인생이다. 아버지는 계속 말을 잇습니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어느 길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게 있다. 너도 언젠가 사람들을 지휘할 때가 있을 거야. 전쟁하고 같아. 사람들을 갈라지게 해선 안돼. 그걸 위해선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먼저 들어주는 것. 또 하나는 힘든 사람이 있으면 꼭 그 집에 가봐라. 직장은 함께 가야 하는 곳입니다. 별별일이 다 생깁니다. 쉴새없이 떠나고 들어오고, 기쁘기도 하고 슬플 때도 많습니다. 정말 전쟁입니다.
필자의 친구가 휴가차 떠난 독도에서 보내온 사진.
저는 여직원이 ‘좀 얘기할 게 있어요’ 하면 무언가 심각한 일이 있음을 직감합니다. 폭발 직전의 상태가 틀림없습니다. 회사가 파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 마주앉은 자리. 그때부터 들어줍니다. 여직원은 한 시간을 넘기면서부터 눈물을 글썽이며 감정이 드러납니다. 저도 그 시절을 겪었기에 애처롭습니다. 맞대고 일하는 차장이나 팀장과의 갈등, 승진문제, 애정문제까지 있습니다. 보통 2시간 가까이 되면서 진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저도 그 시간이 괴롭지만 남녀는 다른 거 같습니다. 여직원들은 섬세합니다. 그걸 다 듣지 않으면 대화 안한 거와 같습니다. 다 들어주어도 제가 어떤 결론을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직원들은 들어준 것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들은 다릅니다. 들어주거나 설득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해결해주려는 ‘동행’이 필요합니다. 하루는 직원이 중요한 일을 미루고 결근을 했기에 밤에 집을 찾아가보았습니다. 남자들은 심각한 일은 남에게 말을 잘 안합니다. 가보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데 아픈 정도가 아니라 우울증이 심해져 공황장애까지 왔습니다. 때론 밤중에 칼부림도 합니다. 유산이 많아 풍족한데 무슨 이유일까요. 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남편 의존도’가 높은 분이었습니다. 다음날 둘이서 전문병원을 수소문해서 어머니를 옮겼습니다. 장남이었던 그 직원은 결근한 그날,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직장 내에서의 아름다운 동행법. 듣기, 가보기.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들입니다. 험난한 시대를 산 우리들 아버지들의 유산입니다. 오늘 울릉도에서 보낸 친구의 사진을 봅니다. 긴 휴가를 떠난 시절, 아버지와 함께 걷던 사동해변의 조약돌들이 파도에 밀려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