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아들 사체 옆엔 성경책 한권이…
통산 다섯 번의 US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했던 ‘링의 강자’ 크리스 벤와.
조사 결과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은 낸시였다. 추정 사망일은 금요일인 6월 22일. 발견 당시 그녀는 팔과 다리가 묶인 상태였고, 몸은 큰 타월로 싸여 있었다. 검시 결과 크리스는 아내를 묶은 후 무릎으로 등을 누른 상태에서 줄로 목을 감은 후 잡아 당겼다. 교살이었다. 머리 아래쪽에 피가 있었는데, 역시 레슬러였던 낸시는 사망 당시 격렬하게 저항한 듯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툰 흔적은 없었다. 사체 옆엔 성경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7세 아들 대니얼은 침대에서 질식사한 상태였다. 역시 옆엔 성경책이 있었다. 검시 결과 혈액에서 신경 안정제인 재낵스가 발견되었다. 벤와가 먹인 것으로 보이며, 죽을 당시 큰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몸에 멍 자국 같은 구타의 흔적은 없었다. 정확한 사망 시간은 추정하기 힘들었다.
이 시기 그의 행동이 정확한 시간으로 남아 있는 건 아내를 죽인 다음 날인 6월 23일 토요일의 행동이었다. 그는 오후 3시 30분에 동료 레슬러인 차보 게레로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늦잠을 자서 비행기를 놓쳐 그날 밤 텍사스의 보몬트에서 함께할 예정이었던 이벤트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차보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크리스의 목소리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이 식중독으로 하루 종일 아프다고 했다. 휴스턴 공항에서 다른 동료 레슬러가 전화를 걸었을 땐, 낸시가 피를 토하고 있으며 대니얼도 구토 증세를 보인다고 말했다.
다음 날인 6월 24일 일요일, 새벽 3시 51분에서 58분 사이에 크리스는 몇 명의 동료들에게 자신과 죽은 아내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연달아 다섯 개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이 가운데 네 개는 내용이 같았다. “우리 집은 조지아주 파예트빌의 그린 미도우 스트리트 130번지다.” 자기 집 주소였다. 그리고 마지막 문자는 이런 내용이었다. “개들은 수영장 근처에 있고 차고 쪽 문이 열려 있다.” 한 마디로 당시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WWE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아들의 구토 증세가 심하며, 자신과 아내는 병원에 있다며, 텍사스에서의 이벤트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알렸다.
이상한 문자를 받은 동료들은 다음 날 WWE에 알렸고, 수석 부사장인 존 로리나티스의 의뢰로 경찰이 크리스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6월 25일 월요일 오후에 참상을 발견했다. 교살, 질식사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단 자살. 사인은 명확했지만, 왜 크리스가 가족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첫 번째 제기된 건 가정 불화였다. 대니얼은 ‘취약 X 증후군’, 즉 다운증후군처럼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정신지체아였고 이 문제는 벤와 부부가 자주 다툼을 벌이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대니얼과 관련된 그 어떤 의료 기록에도 이런 내용은 없었으며, 학교 교사들도 대니얼이 절대 뒤처지는 아이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크리스 벤와 가족 사진. 어느 성경책 갈피에서 발견된 크리스 벤와의 메모에는 “난 지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2003년 5월에 낸시가 가정 폭력을 문제로 이혼 소송을 했다가 3개월 만에 취하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것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하기엔 명확한 연결고리가 없었다. 보험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불충분한 근거였다. 이때 스테로이드 논쟁이 일었다. 프로레슬러들은 종종 스테로이드 성분이 있는 약을 장기적으로 복용했고 크리스 벤와도 그랬다는 것. 그런데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은 조절할 수 없는 분노라는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의 검시 결과 체내에서 스테로이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때 전직 레슬러였던 크리스토퍼 노윈스키가 크리스 벤와의 뇌 손상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크리스가 링에서 겪었던 수많은 뇌진탕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벤와는 등 뒤에서 내려치는 체어 숏을 맞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실제로 조사가 이뤄졌고, “85세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와 같은 수준”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다. 그는 만성적인 외상뇌병증을 겪고 있었고 전두엽, 후두엽, 측두엽, 두정엽 모두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일종의 치매 상태였으며, 그 결과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WWE는 이런 견해에 대해 “추측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프로레슬링의 해악성을 강조할 수 있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유서가 없는 줄 알았지만, 이후 어느 성경책 갈피에서 발견된 크리스 벤와의 메모에는 “난 지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전직 레슬러이자 동료인 밥 홀리는 자서전에서 크리스가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며 이것이 범죄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2007년의 그 일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확실한 건 그에겐 극도의, 가족마저 자기 손으로 죽일 만큼 심각한 절망감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정신적으로 상당한 손상을 입은, 병원의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