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만 되면 ‘축축’ 운동으로 ‘훌훌’
우울증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가족 중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현재까지 연구된 우울증의 원인과 증상, 그리고 치료에 대해 알아본다.
20대 초반의 여대생인 Y 씨는 얼마 전 가족들의 권유로 정신과를 찾았다. 평소 내성적이고 조용해 친구가 많지 않은 그녀는 같은 과에서 단짝이던 친구가 해외연수를 가면서 외톨이가 되었다. 거기다 얼마 전에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마저 갑자기 결별을 통보해 충격을 받았다. 외로움과 허전함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녀는 입맛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을 피하고 아무런 의욕도 보이지 않는 등 심한 우울증을 보였다.
40대 후반의 주부 L 씨도 최근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으로 힘들어 하다 병원을 찾았다. 결혼 전에는 호탕하던 남편이 결혼 후 여러 차례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려 가슴앓이를 하게 하더니 직장을 그만둔 요즘은 집에서 신문과 텔레비전만 보고 지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L 씨가 믿고 의지하던 아들은 군대에 갔고, 딸은 남자친구가 생기더니 엄마와는 얼굴 보고 이야기할 시간이 거의 없다.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는 것도 힘든데 몇 개월 전부터는 폐경기가 되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나는 증상이 생겼다. L 씨는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는 생각에 매사에 의욕이 없이 우울하고 허전해지는 마음을 혼자서 다스리기 힘들었다.
요즘 이처럼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가을과 겨울은 상대적으로 우울증 환자가 많아지는 시기이고, 최근 유명 연예인의 자살 사건이 크게 보도되면서 우울증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을지대학병원 정신과 유제춘 교수의 설명이다.
일생 동안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여성의 경우 10~25%로 10명 중 1~2.5명은 우울증을 겪는다. 5~12%인 남성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나이로 보면 30대 후반~50대 후반의 중년 여성에게 특히 많아 흔히 ‘주부우울증’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많은 여성들을 불행이라는 늪으로 빠뜨리는 우울증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성 우울증의 가장 대표적인 원인은 누적된 스트레스다. 가사노동은 기본이고 엄마와 아내,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스트레스는 기본이고 일을 하는 직장 여성이라면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가족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지만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대부분의 남편이나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 기여도에 무관심하기만 하다.
월경이나 폐경 같은 호르몬 변화도 여성 우울증의 한 원인이다. 여성호르몬의 변화에 따라 몸의 평형상태가 깨지면서 우울증이 쉽게 생기는 시기는 월경과 출산 전후 그리고 갱년기다. 폐경을 전후해 우울증이 특히 많은 것도 이 시기에 여성호르몬의 변화가 가장 급격하기 때문이다.
최근 물가가 많이 오르면서 느끼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남편의 실직, 자녀들의 출가 등 사회적 요인도 한 원인이다.
가을, 겨울이 되면서 일조량이 감소하고 날씨가 쌀쌀해져 활동량이 줄어들면서 찾아오는 계절성 우울증도 있다. 햇빛의 양이 적어지면서 몸속의 멜라토닌 호르몬의 분비가 억제돼 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것이 원인이다. 보통 가을이 시작되면서 증상을 보여 겨울이 되면 더 심해지고 봄부터 서서히 회복된다. 여름철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
계절성 우울증은 여성이 전체 환자의 60~90%를 차지할 정도로 많고,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흔하다. 또 위도가 높고 일조량이 적은 북반구에 계절성 우울증 환자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단순히 뇌 신경기능의 저하가 원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우울증을 보이는 여성들도 많다.
우울증이 있으면 초기에는 불안감이나 무력감, 피로감, 짜증을 보이기 쉽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있어도 ‘그렇지 않은 척’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는 경우가 많아 알아차리기 어렵다.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주던 아내가 전과는 달리 갑자기 밥상 차리기를 힘겨워하거나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 사소한 일에 유난히 짜증을 낸다면 우울증이 아닌지 주의해서 봐야 한다. 이와 함께 잠을 못 자고 두통, 구토, 소화불량, 식욕감퇴 등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든 증상을 호소하는 여성도 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주변의 세심한 배려가 중요하다. 주부우울증이라면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남편의 격려가 있을 때 치료 효과가 크다. 아내가 행복해야 온 가족이 웃고 살 수 있는 법이다. 환자 스스로도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친한 친구나 가족 등 편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자신이 느끼는 심리적인 위축감을 잘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폐경, 아이들의 성장 등으로 인해 우울증을 느낀다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서 독립하는 시기에 자신의 생활로 활력을 찾도록 한다. 각종 문화센터나 학원, 취미교실, 평생교육원 등을 찾아 관심이 있는 분야를 배우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울증이 오래 가거나 증상이 심할 때는 전문의와 상의해 약물치료를 받는 것도 좋다. 유제춘 교수는 “심리적, 환경적 원인으로 생긴 우울증이더라도 신경전달물질이 감소하는 경우가 많아 항우울제 등의 약물로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 좋다. 보통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 습관성, 중독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복용을 꺼리는데 부작용과 습관성이 거의 없는 약들이 나와 있다”고 밝혔다.
계절성 우울증이 의심될 때는 계절이 바뀌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모두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매년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생활에 지장을 주는 정도라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다.
다른 우울증에 비해 계절성 우울증은 스스로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유지하고 조깅, 수영, 자전거타기 등의 유산소 운동을 하면 좋다. 또한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는 과일이나 야채, 해조류 등을 많이 먹고 물을 많이 마신다. 햇빛은 자주 접할수록 좋으므로 직장인들은 점심식사 후에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지나치게 달거나 카페인이 많은 식품은 일시적으로 울적한 기분을 없애주지만 결과적으로는 몸에 해로우므로 삼간다.
이런 방법으로 증상이 좋아지지 않으면 병원을 찾는 게 좋다. 병원을 찾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는 우울증 무료상담을 해주는 블루터치 핫라인(1577-0199·www.suicide.or.kr), 열린마음상담센터(031-242-6673) 등에 연락하면 24시간 전문가와의 상담이 가능하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을지대학병원 정신과 유제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