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한테 총 겨누는 못된 버릇 못 버리고 ‘철창행’
필 스펙터
필 스펙터의 활동 기간은 매우 길었다. 1958년에 음악을 시작한 그는 1960년대에 사운드 녹음의 혁신을 이룬 ‘월 오브 사운드’ 방식으로 각광 받았다. 직역하면 ‘소리의 벽’을 만드는 것으로, 여러 소리를 쌓아 풍성한 사운드를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잠시 은퇴했지만 1970년 비틀스의 ‘렛 잇 비’(Let It Be) 앨범으로 돌아온 그는 레너드 코헨과 비치 보이스와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뮤지션들의 프로듀서가 되었다. 이후 브루스 스프링스틴, 롤링 스톤스, 아바 등 전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필 스펙터의 사운드에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고 수많은 후배 프로듀서들도 필 스펙터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1990년대에 잠시 휴지기를 가지는 듯했지만 2003년 그는 영국의 인디 록 그룹 ‘스타세일러’의 앨범을 제작하며 돌아왔고, 사람들은 70대에 접어든 노장 프로듀서의 귀환을 반겼다. 그는 단순한 엔지니어나 프로듀서가 아니라 곡을 쓰고, 보컬 지도를 하고, 연주자들을 조율하고, 녹음 시스템을 만들었던 창조적인 아티스트였고, 이런 영역을 개척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2003년 2월 3일 오전, 필 스펙터는 캘리포니아의 웨스트 할리우드에 있는 ‘하우스 오브 블루스’에 들렀다. 무대가 있어서 라이브 콘서트를 즐기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었던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하는 한 여성을 만난다. 큰 키에 모델 스타일의 중년 여성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함께 나왔다.
라나 클락슨
60대의 작달막한 남자(165센티미터)와 40대의 장신 여성은 레스토랑 밖에 대기 중이던 리무진에 탔다. 동쪽으로 30분 정도 달렸고, 캘리포니아의 알람브라 지역에 있는 대저택 ‘피레네 캐슬’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갔고, 운전기사인 아드리아노 드 수자는 밖에서 대기했다. 한 시간 후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곧 이어 스펙터는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집에서 나오며 혼잣말처럼 “내가 사람을 죽인 것 같아”라며 중얼거렸다. 스펙터는 저택 뒷문으로 나갔고, 드 수자는 황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클락슨은 의자에 앉은 채 고꾸라진 모습이었다. 그는 911에 전화를 걸었고, 의료진과 경찰이 도착했다. 사인은 총상. 입에 총을 쏘았다.
스펙터는 클락슨이 총에 키스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스스로에게 총을 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스펙터는 이미 이전에도 집으로 데려 온 여성들에게 총을 겨눈 적이 있었다. 총 네 명의 여성이었다. 그들은 스펙터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요구했는데, 거부하면서 집에서 나가려 하자 갑자기 총을 겨누었다고 증언했다. 재판은 4년 뒤인 2007년 3월에 시작되었고, 그 기간 동안 스펙터는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재판 결과는 ‘무효’였다. 배심원들의 의견이 엇갈려 평결을 내놓지 못한 ‘불일치 배심’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과학수사관 헨리 리는 유죄 입증의 결정적 증거를 숨겼다는 이유로 기소됐고, 스펙터는 재판 기간 동안 변호사를 두 번 바꿨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필 스펙터>의 한 장면.
2차 공판은 2008년 10월에 시작됐고 2009년 4월에 유죄 선고와 함께 19년형이 내려졌다. 그는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 복역을 시작했다. 변호사는 상소를 하고 대법원에 진정서를 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재판이 불공정했다며 인신 보호 영장을 신청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선처를 호소했지만 모두 기각당했다. 2013년엔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필 스펙터>가 나왔는데 알 파치노가 스펙터 역을, 헬렌 미렌이 변호사 린다 케네디 베이든 역을 맡았다. 변호사는 스펙터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했고, 목격자들에 의하면 건강이 좋지 않은 건 확실했다. 2014년 소식에 의하면 현재 스펙터는 후두 쪽의 유두종증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 하지만 교도소에서 나오려면 2028년까지 12년이 남았고, 그때 스펙터는 89세가 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