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보다 아름다워>, <한강수 타령>에서 우리네 어머니상을 연기한 탤런트 고두심이 지난 연말 KBS와 MBC(오른쪽) 두 방송사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거머쥐어 눈길을 끌었다. | ||
고두심은 언젠가 ‘나의 삶, 나의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지난해 12월31일 그가 KBS 연기대상을 받는 순간 다시 한번 수상소감으로 남겨 화제가 되었다. “어머니의 힘이 이렇게 큰 것 같다. 어머니 역할을 안했으면 나한테 이렇게 큰 상이 두 번씩이나 오는 이변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고두심의 눈가에는 눈물이 촉촉이 배어 있었다.
연기자 고두심. 그의 이름 석자는 이제 대한민국 연기자의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2005년 올해로 연기생활 35년째를 맞는 고두심은 그동안 해온 작품만도 수십여 편에 이르며, 수상경력도 다양하다. 고두심은 지난 해 연말 두 방송사의 대상을 동시 석권한 것 말고도, 이미 다섯 번의 대상 수상이라는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새해 1월2일 오후, 아직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한 고두심과 전화 인터뷰를 나눴다. 이틀 동안 연이은 수상식 뒤풀이에 이어, 전날도 MBC <한강수 타령> 녹화를 하느라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는 고두심의 목소리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들떠 있었다.
지난 2004년은 고두심에게 평생 잊지 못할 한해가 될 것이다. 그가 MBC <한강수 타령>과 KBS <꽃보다 아름다워>로 두 방송사에서 동시에 대상을 받는 ‘이변’을 만들어낸 것. 고두심이 연기한 인물은 모두 ‘어머니’ 역이었다. <한강수 타령>에서 그는 작은 집의 자식들까지 떠안아 키우는 억척스런 생선장수 어머니역으로 출연중이고,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는 바람난 남편의 ‘여자’에게 신장까지 떼어주는 가슴 저미는 어머니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동안 수차례 어머니 역을 맡아왔던 그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께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 속에는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상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고두심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전했다.
“내 어머니는 나의 ‘종교’와 같습니다. 극중 모습은 연기라기보다는 어머니를 닮은 내 모습 중 일부예요. 어느 순간엔 내가 저 인물인지, 저 인물이 나인지 모를 만큼 배역에 빠져서 지냈던 것 같아요.”
고두심은 지난 12월30일 MBC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다음날엔 KBS에서도 연이어 대상을 수상했다. 큰상을 두 개씩이나 동시에 받은 일은 그 자신도 믿기 힘들었다고. 더구나 MBC <한강수타령>은 현재 방영중인 작품이라 고두심도 이에 대해 ‘좀 의아했다’고 털어놓았다.
“<꽃보다 아름다워>는 너무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KBS로서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사실 MBC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웃음) 지금 방영이 끝나지 않은 드라마여서 ‘대상 후보’에 들어갈 수 있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MBC에서 상을 받아 좀 어리둥절했었죠.(웃음)”
KBS <꽃보다 아름다워>는 고두심 스스로도 ‘평생 기억에 남을 작품’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꽃보다 아름다워>의 작가 노희경씨 역시 이날 시상식에서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미 지난 한 해 이 작품은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한국방송작가상, 한국방송대상 작가상 및 탤런트상,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의 올해의 좋은 방송상과 시청자 단체와 시민 단체에서 주는 각종 상들을 휩쓸었다.
특히 고두심의 역할은 대단했다. 그가 맡은 ‘이영자’ 역은 작가 노희경씨가 애초부터 고두심을 염두에 두고 써내려간 인물. 그러나 고두심은 “어느 한 인물도 소홀한 배역이 없었다. 배종옥 한고은 김명민 김흥수도 그렇고, 다들 잘해주었다”며 함께 출연한 연기자들에게 공을 돌렸다.
▲ KBS <꽃보다 아름다워>(왼쪽), MBC <한강수 타령> | ||
“우리 윗대 어머니들은 만약 남편이 신장을 내놓으라고 하면 주었을 거예요. ‘가슴을 도려내는’ 삶을 사셨는데 그까짓 신장 하나 못 내주었겠습니까. 희생과 봉사를 평생의 업으로 사신 분들이신걸요.”
어머니에 대한 고두심의 사랑은 대단하다. 그는 방송을 통해 고향 제주도와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여러 차례 표현한 바 있다. 지난 2003년엔 연기생활 만 30년을 맞이한 기념으로 7박8일 동안 제주도를 걸어서 일주하기도 했다. 그가 열아홉까지 자라서 커온 제주도에서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자.
고두심은 1951년 5월 지금의 제주시 중앙로 근처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3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열네 살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10년 동안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로 활동했던 그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제주도 여자’인 그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의 외모를 쏙 빼닮았던 고두심은 어릴 적부터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키웠다고 한다. 어느 날 둘째오빠가 구해온 영사기를 통해 영화를 보며 막연하게 영화배우에 대한 동경을 가졌던 것. 그는 고등학교 시절 특채로 중앙대 무용과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뭍으로 나갈 수 없었던 고두심은 졸업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서울서 공부하는 오빠 밥해주러 가겠다’는 핑계로 허락을 받고 서울 가는 배에 오른다. 당시에 대해 고두심은 “어린 시절 현해탄을 건넜던 아버지의 개척정신과 어머니의 인내심이 나를 서울로 이끈 것 같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서울에서 작은 무역회사의 직원으로 취직해 4년쯤 다니다가, ‘가슴 속의 불’을 끄지 못했던 고두심은 MBC 공채탤런트 시험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한다. 그때가 스물셋.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는 고작 가정부나 호스티스와 같은 것들이었고, 그나마도 없을 땐 그저 녹화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무역회사와 방송국을 오가며 두 가지 직업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두심은 <갈대>라는 드라마에 처음 주인공으로 캐스팅된다. 김혜자, 이정길과 함께 삼각관계에 빠지는 역할이었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고두심이라는 여배우를 세상에 ‘제대로’ 알리게 된다.
이후 고두심은 연기자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혼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스물다섯, 무명배우 시절에 만난 남편과 지난 98년에 헤어진 것. 결혼 22년째 되던 해였다. 맏딸 홍과 아들 정환은 현재 모두 미국에서 직장을 다니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고두심은 두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다”며 안쓰러운 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배우로서 고두심이 가지고 있는 불만 중 하나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어머니’나 ‘할머니’역을 하게 된 것. 그 덕분에 오랜 시절 동안 그는 김혜자와 함께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인식돼 왔지만, 고두심 자신에게는 아쉬움도 있다고 한다.
“데뷔를 좀 늦게 했지만 그 나이에도 처음부터 아줌마나 할머니역만 맡았어요. 처녀 역할은 한 번도 못해본 연기자죠.(웃음) 배우로서는 너무 일찍 젊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잃은 게 아닌가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에요. 이러다 빨리 도태될 것도 같았고. 그래서 일부러 2~3년에 한번쯤은 좀 멋스러운 역할을 선택해요. <인어아가씨> 때도 디자이너 역이어서 예쁜 옷도 많이 입어보고 좋았죠.(웃음)”
그동안 출연했던 수십 편이 넘는 작품 중에 특히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작품은 어떤 것들일까. 물론 이번에 대상을 안겨준 <꽃보다 아름다워>는 그 중에서도 ‘1순위’로 꼽는다. 그 밖에 고두심은 “사람들이 많이 기억해주는 <춤추는 가얏고>를 빼놓을 수 없고, 물론 <전원일기>도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연기자 고두심을 말할 때, 그가 털어놓은 대로 사람들은 <춤추는 가얏고>를 많이 떠올린다. 오연수의 데뷔작품이기도 한 <춤추는 가얏고>에서 고두심은 서른아홉의 나이에 할머니 역을 맡아 지난 90년 MBC연기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원일기>는 그에게 ‘맏며느리’의 이미지에 갇혀 지내게 만든 작품이었다. 고두심은 “20년간 <전원일기>에 출연하면서 평소에도 그 이미지에 맞게 사느라 힘든 점이 많았다”며 웃으며 털어놓았다.
배우의 삶은 때로 이런 에피소드를 낳기도 한다. 고두심은 <꽃보다 아름다워>를 촬영하는 동안 가족들에게 ‘질타’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작품과 역할이 주어지면 머릿속으로 항상 그 인물을 떠올려요. 너무 ‘영자’ 속에 빠져 지내는 바람에 집에서 나도 모르게 그 인물의 표정을 지으며 생활했던 적이 많아요. 가족들에게 혼도 많이 났죠.(웃음)”
고두심은 지난해 영화 <인어공주>에서 ‘파격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고두심은 ‘목욕관리사’로 등장해 과감히 ‘비키니 몸매’를 공개했는데, 그 일은 사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때 조금 고민했던 게 사실이에요.(웃음) 왜냐면 내가 ‘어정쩡한’ 몸매거든. 그 나이대의 목욕관리사들은 배에 ‘삼겹살’이 나와야 하는데, 나는 날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삼겹살이 나온 것도 아니고 애매했어요. ‘몸짱’이라고 기사가 나오고 해서 참 민망했죠.(웃음)”
그는 이제 새로운 변신을 앞두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그는 연기생활 32년 만에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 <먼길>에서도 역시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는 오는 3월 개봉될 예정이다.
과연 고두심에게 연기란 어떤 의미일까. 막연한 질문일 수도 있는, 한마디로 대답하기 힘들 수도 있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져 보았다.
“그냥 내 삶 자체가 연기의 일부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배우들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 내가 없어져요. 배우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울릴 수 있어야 하거든요. 내 행동과 말로서 말이에요. 그럴 수 있으려면 내가 그만큼 비워지고 다른 세계를 채워 넣어야 해요. 때로 마음속에서 욕심도 생기고 나쁜 생각도 들지만 그런 찌꺼기들을 떨쳐내려고 발버둥치는 삶, 그게 배우이고 내게 있어 연기인 것 같아요. 어느 날, 그냥 마당에 앉아 풀 한 포기를 보면서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생겼니…’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삶을 연기자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