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우 페르소나’가 선택한 밀실 스릴러…“비현실 속 현실 보여주고자 했죠”
‘김대우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페르소나, 배우 조여정(43)이 그의 세 번째 세계 속에 다시 발을 들이밀었다. ‘방자전’(2010)과 ‘인간중독’(2014)에 이어 무려 10년 만에 호흡을 맞춰 공개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히든페이스’에서 조여정은 저택 안 밀실에 갇힌 채 자신의 약혼자와 친한 후배의 밀회를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첼리스트 수연을 연기했다. 관계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로 이들의 배신을 맞닥뜨리게 된 처절함과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날것의 욕망까지 날카롭게 그려낸 조여정은 적은 출연 분량 속에서도 완벽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수연이는 연기하기 진짜 어려운 캐릭터예요. 밀실에 갇혀 마땅한 애라고 관객 분들이 나쁘게 보셔도 할 말이 없죠(웃음). 어떻게 보면 이건 영화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도 속에서 꺼내지 못한 욕망의 작은 씨앗들을 수연을 통해 보여줄 수 있던 것 같아요. 영화적인 상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더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했고요. 촬영할 땐 수연이를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느라 다른 건 돌아보지도 못 했다니까요(웃음).”
오케스트라를 소유한 부잣집 따님인 수연은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잘생긴 마에스트로인 약혼자 성진(송승헌 분)과의 결혼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성진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조바심 탓에 친한 후배 첼리스트인 미주(박지현 분)와 짜고 성진을 시험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신혼집에 설치된 밀실에 숨어 성진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나타나려 했지만, 계획 실행을 도운 미주의 배신으로 영원히 밀실에 갇히게 될 위기에 처한다. 두 배신자가 각자의 욕망에 휘감긴 관계를 맺는 동안 수연은 밀실 안에서 이를 지켜보며 처절한 분노를 토해낸다.
“수연은 인간이든 물건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가져야만 한다는 강력한 소유욕을 지닌 인물이에요. 내가 원하는 건 다 가져야 하고, 다 내가 원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인의 기분은 어떨지는 고려하지 않는 진짜 에고이스트죠. 미주가 배신하기 전에 수연이 그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면 더 그래요. 언니가 올 거라면서 기대로 가득 찼던 애가 수연이의 매몰찬 말을 듣고 우는데, 저도 촬영하면서 ‘야, 수연이 진짜 대단하다’ 싶더라니까요. 얘는 정말로 갇혀도 할 말이 없는 애예요. 애가 너무 못됐어(웃음)!”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직접 ‘갇혀도 싸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강조할 정도로 수연은 ‘못되고 이기적인’ 여자다. 그의 말마따나 철저한 영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비현실적인 인물이지만, 구축 과정에서 배우의 세심한 디테일이 더해지면서 관객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은 ‘현실 판타지’가 완성됐다. 특히 밀실 안에서 배신에 미쳐가면서도 그 상황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조여정이 설정한 ‘수연스러움’ 가운데 하나였다고 했다.
“밀실에 계속 갇혀 있으면서도 수연이는 킬힐을 절대 벗지 않아요. 그건 걔의 존엄과도 같거든요(웃음). 따로 그런 설정을 둔 게 아니라 연기하다 보니 너무 자연스럽게 그 모습이 상상되더라고요. 밀실에 갇혔더라도 무너지는 건 나 자신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이런 느낌인 거죠(웃음). 나중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라면을 발견하고 역겨워하다가도 먹을 때 보면 스프를 톡톡 찍어가며 되게 우아하게 먹잖아요? 그 모습이 수연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밀실 안에서 수연이 유일하게 흐트러지는 순간은 신혼집 안방에서 성진과 미주가 관계를 가지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될 때였다. 자신의 의도대로 배신을 완성한 여자와, 의도가 없더라도 그 완성을 적극적으로 도운 남자를 두고 수연은 먼저 여자에게 폭발한다. 관계를 지켜보는 내내 성진이 아닌 미주의 이름을 외치며 분노를 쏟아냈다가 처절하게 애원했다가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오가는 식이다. 이 장면을 연기할 때도 조여정은 누구에게 먼저 분노를 터뜨릴 것이란 계산 없이 현장 자체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
“수연이 성진과 미주의 베드신을 지켜보는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 별다른 계산을 하지 않고 현장에 바로 들어갔었어요. 그런데 본능적으로 미주의 이름을 먼저 부르게 되더라고요(웃음). 아마 수연은 그 자리에서 의도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죠. 그 관계에서 성진에게는 의도가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성진에 대한 배신감은 당연히 느꼈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감히?’라는(웃음).”
김대우 감독의 세계에 익숙해져 있던 조여정에게도 제대로 만들어내기 까다로운 인물이었던 수연을 완성해내는 데 가장 큰 힘이 돼준 것은 미주 역의 박지현이었다. “(박)지현 씨만 보고 있어도 수연이 완성되는 것 같았다”는 조여정은 무엇보다 박지현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향해 몇 번이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극 중 수연이 절대 알 수 없는 미주의 지독한 절망을 그처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가 지금 지현 씨 나이였다면, 미주라는 캐릭터를 그렇게 연기하지 못했을 거예요. 미주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고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너무 신기하더라고요(웃음). 특히 성진과 함께 있을 때 미주가 하는 말들이 정말 자연스럽게 다가왔어요. 사실 극 중에선 수연과 미주가 같이 붙는 신이 많진 않았지만, 제게도 정말 좋은 자극이 돼준 배우예요. 진짜 ‘히든페이스’에서 제가 연기한 수연은 다 이 친구한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제 앞에 선 지현 씨의 눈을 보고 있으면 ‘아, 나는 그냥 믿고 연기만 하면 되겠다’는 믿음이 막 생기더라고요(웃음).”
김대우 감독이 세 번째로 조명한 조여정의 ‘새 얼굴’은 적은 분량 속에서도 완벽한 존재감으로 빛났다. 인간의 비현실적인 욕망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낸 그의 연기는 이 영화가 단순히 ‘파격적인 베드신’으로만 소비되는 것 그 이상이 돼야 한다는 주장의 뚜렷한 근거로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히든페이스’에서 증명했듯이, 데뷔 26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조여정은 여전히 대중들이 즐거운 조바심으로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게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역할을 주실 때면 ‘내가 안 해본 걸 주셨어, 너무 좋아!’ 이렇게 돼요(웃음). 한편으론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늘 도전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에게 있어서 이제껏 안 해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는 잘 오지 않으니까요. 앞으로 또 누군가 제게 다른 모습을 떠올려 주신다면 그걸 따라 제 선택의 폭도 넓어질 거예요. 하지만 지난번과 약간 비슷한 역을 주셔도 또 해나가겠죠(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