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논리가 ‘히포크라테스’를 죽였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 응급의료센터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비즈한국DB
골반도 고정하고, 복부를 열어서 장기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지혈하는 수술이 한시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더불어 발목에도 개방성 골절이 있어 미세접합 수술을 해서 닫아주어야 했다. 전북대병원 응급실에서는 즉시 본원 수술이 가능한지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시간은 오후 6시고, 응급수술만 가능하다. 시스템상 야간에 열 수 있는 수술방은 2개이지만, 현재 두 방 모두 수술이 진행 중이다.
본원 수술이 되지 않는 환자라면 무조건 한시라도 빨리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보내(전원)야 한다. 그래야 환자를 처음부터 더 종합적으로 케어할 수 있어 생존율이 오른다. 불가피한 상황이므로 가장 좋은 선택은 최대한 가까운 병원으로 가서 즉시 수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스템은 일일이 전화를 해서 알아보는 거다. 그래서 담당의는 가깝고 외상 치료가 가능한 병원에 하나둘 전화를 건다.
원광대병원이 거부하자, 이제 전원 문의는 한 개 도를 가로질러야 한다. 대전의 을지대, 충남대병원이나 광주의 전남대병원이다. 기본적으로 여기서 한 번 문제에 부딪힌다. 전라북도의 중증외상환자는 전북대나 원광대병원의 수술이 불가능하면 무조건 한 개 이상의 도경계를 넘어야 한다. 아무리 빨라도 길에서만 1시간 30분은 더 걸린다.
이제 전화를 받는 입장이 되어보자. ‘2세 중증 외상’, ‘발목 미세 수술’, ‘생사의 기로’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까다로운 요청이다. 게다가 외상센터로 지정이 되어 있어도, 당시 충분한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환자가 위험해지므로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전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되어 있다. 환자는 이미 시간이 지나 사망 확률이 높고, 2살이라 엄청 까다로운 수술을 해야 하는 데다 병원에 경제적으로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환자다. 전원을 받아줬을 경우 모든 사람의 고생문이 눈앞에 훤하다.
안 받을 이유는 엄청나게 다양하고 많고 가깝다. “응급수술 중이라 수술방이 없다.” “수술을 하고 나와도 중환자실이 없다.” “발목을 미세접합할 의사가 없다.” “미세수술 기계가 고장 나서 지금 수리 중이다.” “우린 원래 소아외과 전문의가 없다.” “외과가 학회 중이라 수술할 사람이 없다.” “노조 파업이다.” “누구 휴가다.” 사실 여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이 중 하나만 대면 전화 거는 입장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기사에 따르면 전북대병원은 이러한 전화를 전국에 14통을 걸고 전부 거부당했다. 그래서 아이는 전주에 있는 응급실에 6시간 동안 있다가,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연결해준 수원 소재 아주대 병원까지 헬기를 타고 간다. 이송할 헬기는 늑장을 부리고, 아주대 병원에 도착하니 자정이다. 결국 그때야 아이는 수술방에 들어가고, 익일 새벽 4시 40분 사망한다.
중증외상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을 그린 드라마 ‘골든타임’ 스틸컷. 사진=MBC
꼭 중증외상환자가 아니더라도, 외상을 입은 중환자 하나 전원 보내기는 정말 힘겹다. 전화를 여기저기 돌려보고도 못 보낼 때가 많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면 무조건 손해만 보는 환자이고, 그래서 이 시스템은 잘 안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자를 다른 병원에 보내고 받는 과정에서 경제적 논리는 생각보다 아주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지방에서 일하는 것은 누구나 다 싫어한다. 직장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누군가가 지방에 가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득이 분명할 때다. 당장 정부가 권역외상센터를 지정하자, 그 센터에선 외상외과 의사가 있으면 지원금을 받으므로 채용 공고를 냈고, 외과의사 입장에선 커리어가 쌓일 수 있으므로 그 수요만큼의 외과의사가 각 시도 중심 병원에 몇 명 더 고용되었을 뿐이다.
이 센터까지 마련해 놓고도, 여기서 다른 시도의 외상 환자까지 치열하게 받아야 할 이유는 그다지 많지 않다. 병원 재정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환자인 데다 많은 사람의 손이 가고, 잘못되면 책임 뒤집어쓰고 해명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2012년부터 뒤늦게 외쳤던, “전국 어디서든 외상 환자를 살린다.” “외상 환자를 무조건 받아 살려라.” 이런 공염불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논리가 해결되지 않아 쇠귀에 경 읽기다.
아시다시피 ‘외상’은 대표적으로 보험 적용이 되는 분야고, 또 많은 처치가 급박하게 이루어지므로 환수가 쉬운 분야다. 가뜩이나 수가 자체도 낮을뿐더러 병원 입장에서는 적자로 골치 썩인다. 게다가 ‘소아외상’은 난이도도 높고, 보험 적용은 더 엄격하다. 이런 경제적인 논리 때문에 진짜 외상을 다루는 의료 분야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고, 체계도 말라버리고 있다.
경제적인 논리임을 파악한 정부는 외상센터 건립에 헛된 돈을 쏟아 붓고 있지만, 결국 시스템의 근원은 놔둠으로써 문제를 계속 방치하는 꼴이다. 그 와중 우리나라에선 1년에 3만 명이 외상으로 꼬박꼬박 죽어가고 있다.
중증외상환자, 말은 참 쉽지만 실제로 마주하면 너무 끔찍한 단어다. 환자는 죽음 직전의 고통에 계속 발버둥 친다. 수술을 한다고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서 수술한 이후라면, 이제는 나아질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으므로 고통도 견딜 만하다. 여기서 어떠한 조치도, 희망도 없이 마냥 응급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증외상환자들은 가만히 보고 있기에도 너무나 딱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외상 환자 시스템은 내가 적나라한 글을 써냈던 2013년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2016년에도 사람은 교통사고가 나면 죽는다. 이 생생한 증명을 나는 오늘도 한 기사에서 읽어낸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칼럼 원문은 비즈한국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