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의 ‘반전’
▲ 강경 투쟁을 이끈 원혜영 원내대표는 ‘야성’을 회복했다는 평가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한동안 야성 부재와 정체성 논란 등으로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혔던 정세균 대표-원혜영 원내대표의 투톱 체제에 힘이 실리면서 당내 계파 갈등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형국이다. 특히 ‘돈키호테’로 불리는 저돌적인 홍 원내대표를 상대로 유리한 협상안을 이끌어낸 원 원내대표의 ‘햄릿’형 스타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원 대표는 CEO와 민선시장을 경험한 정치인이다.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으로 투옥과 재적을 반복한 운동권 출신이기도 하다. 1971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한 뒤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 원 대표는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 탓에 취업이 어려워지자 81년 31세 때 풀무원식품(주)을 창업한다.
기업인 시절 그는 국내 최초 친환경 기업 모델을 제시한 CEO로 명성을 날렸다. 92년 14대 총선 때 민주당 공천으로 경기도 부천시 중구 을에서 당선돼 정치권에 입문한 원 대표는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도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될 때 민주당 잔류를 선택했다. 선거구가 부천시 오정구로 바뀐 96년 15대 총선 때 국민회의 후보에게 불과 390표 차로 석패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원 대표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한다. 98년 민선 2기 지방선거 때 부천시장에 출마해 당선된 후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부천시장 재선에 성공했다.
부천시장 재임시절에는 국내 대표 영화제로 자리매김한 부천 판타스틱영화제를 개최하고 애니메이션 특성화를 추진해 부천시를 문화도시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 대표는 2003년 말 부천시장을 사퇴한 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 부천시 오정구에 당선돼 재선에 성공한 후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최고위원,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원 대표는 지난해 18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3선 중진 반열에 오른 뒤 같은해 5월 27일 통합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강래 의원을 제치고 당선되면서 제1 야당 원내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 국회 파행 속 극적으로 합의를 도출한 여야 원내대표 | ||
당내 통합과 단합을 이뤄야 하는 선결 과제를 안고 있었고,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한 거대 여당으로 자리매김한 사실도 그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여기에 대여 협상 파트너가 저돌적이면서도 지략을 겸비한 홍 대표라는 점 역시 적잖은 부담이 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원 대표는 당시 “홍 대표가 주관이 뚜렷하면서도 타협적인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에 기대하고 있다”면서 “협상할 건 협상하고 싸울 것은 당당히 싸워나가겠다”며 ‘홍 대표에 밀릴 것’이라는 예상을 일축했다. 그는 또 한나라당이 압박하고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 문제와 관련해서도 “쇠고기 재협상 없이는 FTA 비준은 없다”는 강경 노선을 견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 대표의 ‘대안 야당론’은 좀처럼 그 빛을 보지 못했다. 미국발 금융위기 등으로 여권이 총체적 난국에 직면했음에도 민주당의 지지율은 10% 안팎을 벗어나지 못했고, 야성 부재와 정체성 논란이 증폭되면서 잠복된 계파 갈등이 폭발할 조짐도 감지됐다.
정세균 대표와 원 원내대표가 지난해 연말에 ‘본회의장 점거’라는 초강경 카드로 ‘입법 전쟁’을 진두지휘한 배경에는 두 사람의 위기 돌파 복심이 투영돼 있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거대 여당을 상대로 계속 끌려다니다간 희망이 없다는 위기감에 공감한 두 사람이 내부 결속과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해 최강 승부수를 띄운 게 아니냐는 것이다.
아직 ‘전쟁’이 종결된 건 아니지만 1차 입법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민주당과 원 대표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여 강경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당의 지지율은 20%를 웃도는 상승세를 기록했고 ‘야성 회복’이라는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당내 여러 계파 의원들과 당직자들이 본회의장 점거 기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끈끈한 결속을 다졌고 지지층이 재결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도 큰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원 대표 입장에선 이번 ‘입법 전쟁’을 통해 당내 입지는 물론 정치적 위상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렇다고 원 대표의 향후 행보가 순탄할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원 대표 스스로 국회 폭력사태와 파행을 야기한 당사자라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본회의장 점거라는 ‘벼랑 끝 전술’로 국회를 마비시키고 ‘폭력 국회’라는 오명을 남겼다는 사실은 장기적으로 원 대표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원 대표의 임기는 오는 5월 27일까지다. 원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 때 경기도지사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화한 햄릿형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원 대표의 대여 강경투쟁 노선이 2차 입법 전쟁 및 그의 중장기 정치 행보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