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법에 정통… 멈추는 법 몰랐다
▲ 촛불 재판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신영철 대법관이 지난 12일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 ||
충남 공주 출신인 신 대법관은 1972년 대전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1976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법시험 18회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1981년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디뎠다. 당시만 해도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성적 모두 최상위권을 유지해야만 서울지역 근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시절이다.
신 대법관은 대구지법 판사와 청주지법 영동지원장을 지낸 후 1988년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으로 발령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송무심의관은 재판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의 흐름과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자리다. 당연히 법관들이 선망하는 보직이다.
특히 법원행정처는 법관과 일반직 공무원들에 대한 인사뿐 아니라 재판절차, 사건처리 방향 등을 결정하는 사법부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사법부의 사령탑’으로 불리기도 할 만큼 중요한 조직이라는 게 법원 내부의 공통된 의견이다.
송무심의관으로 3년 동안 일한 신 대법관은 1991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맡게 된다. 재판연구관의 주요 업무가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을 검토해 대법관의 판단을 돕는 일이기 때문에 치밀한 법논리를 펼 수 있는 법관들이 `간택’되는 게 일반적인 경우다. 평판사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3년, 대법원에서 1년을 보낸 신 대법관은 일찌감치 `행정’과 `재판’에 눈을 뜨게 된 셈이다.
대법원 근무 당시 신 대법관과 함께 일했던 아무개 변호사는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실수가 없었고 두뇌 회전도 빨라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맡기는 일마다 깔끔하게 처리하는 신 대법관에게 선배 법관들이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주요 보직을 섭렵하며 사법연수원 동기 가운데 선두를 달리던 신 대법관은 부장판사 시절인 1995년 사법연수원 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또 한 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연수원 교수는 연수생과 교수 신분으로 맺어진 끈끈한 관계가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 계속 이어진다는 점에서 법관이라면 한 번쯤 욕심을 내는 자리다. 신 대법관이 가르친 제자들은 현재 부장판사 승진을 목전에 둔 중견 법관이나 대형로펌의 파트너급 변호사로 성장해 법조계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 `법원의 꽃’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한 신 대법관은 당시 최종영 대법원장의 비서실장에 임명된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은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 지난 2월 이명박 대통령이 신영철 신임 대법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로 이용훈 대법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신 대법관은 2003년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판에 복귀한 후 이듬해 그의 `정치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남긴다. 2004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란 음모 재심사건 재판장을 맡은 신 대법관은 김 전 대통령이 피고인석에 서자 직접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한 뒤 “대법원장 비서실장 시절 청와대를 찾아 인사드린 적이 있다”며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말씀해 달라”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이 관련된 사건이고 재심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매우 이례적인 배려다.
신 대법관은 2005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사법행정’에 나서기 시작한다. 당시 재판부마다 양형이 들쭉날쭉하다는 비판이 일자 21개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표를 만들고 구속영장 처리기준과 수사기록 간이화 방안 등을 마련하는 등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재판과 관련된 신 대법관의 성향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인 2004년 1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에게 실형선고를 내리고 법정구속하는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 엄한 판결을 내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보수적인 판결을 많이 내렸다는 것이 법원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서울중앙지법의 모 부장판사는 “신 대법관은 형사재판 전문가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절차나 법리에 정통하지만 국가보안법 사건 등에서 전향적인 판결을 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엘리트 법관으로 탄탄대로를 걷던 신 대법관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대법관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면서부터다. 수원지법원장 시절인 2006년 6월 처음으로 대법관 후보 물망에 오른 신 대법관은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가 압축한 후보군에 들었지만 법조계 선배인 이홍훈 박일환 김능환 안대희 대법관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전수안 대법관이 임명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다.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관 수가 13명에서 14명으로 늘어난 2008년 2월에도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던 신 대법관은 신임 대법관 하마평에 오르내렸지만 차한성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밀려 대법관을 놓쳤다. 그러나 차 대법관이 신 대법관보다 사법연수원 기수로 1년 선배였기 때문에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008년 6월 신 대법관에게 예상치 못했던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김황식 대법관이 감사원장에 임명되면서 대법관을 다시 임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두 차례 대법관 후보에 오른적 있는 신 대법관도 내심 기대했을 법한 상황이 전개됐다. 서울중앙지법원장은 한때 `대법관의 길목’이라고 인정될 만큼 요직인 데다 법원 안팎에서 신 대법관이 적임자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당시 `학계 출신 대법관이 없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도 있었지만 역대 대법관 중 교수 출신은 한 명도 없었던 탓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신 대법관이 유력하게 거론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추천한 4명의 후보에 오른 신 대법관은 그러나 예상과 달리 양창수 서울대법대 교수에게 밀리면서 또 다시 고배를 마셨다. 따라서 올 초 퇴임한 고현철 대법관의 후임 인선은 그에게 있어 대법관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마지막 기로였던 셈이다. 대법관 후보에 여러 차례 거론된 신 대법관으로서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도 가능한 대목이다. 서울중앙지법원장에서 대법관이 되지 못하면 지방의 고등법원장으로 내려가거나 변호사로 개업하는 것 두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등법원장이 대법관이 된 사례는 매우 드문 경우다.
신 대법관은 지난 1월 법관 신분으로 대법관이 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를 잡았고 이용훈 대법원장은 “전문적 법률지식과 합리적 판단력, 인품 등 대법관이 갖춰야 할 기본 자질과 건강, 국민을 위한 봉사 자세 등을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했다”며 그를 대법관에 제청했다. 4수 끝에 법관으로서는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대법관에 오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법관이 된 그에 대한 평가는 법원 내에서도 극명하게 갈린다. 소장판사들은 신 대법관에 대해 `소통이 부족하고 자기주장만 강하다’고 평가하는 반면 고법부장판사 등 고위 법관들은 `섬세한 면이 많고 온화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수원지법에서 신 대법관과 함께 근무한 아무개 부장판사는 “신 대법관은 감정표현이 별로 없어 다가서기 어려운 분이지만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에서 단독판사로 일했던 아무개 판사는 “근무평정권이 있는 법원장에게 대놓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평판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며 “물리적인 사법행정권을 앞세우기 전에 법관 대 법관으로서 동등한 자격으로 의견을 나눌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토로했다.
신 대법관 본인이 판단하는 자신의 성격은 어떨까. 그는 대법관 후보에 추천되는 과정에서 제출한 자기의견서에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사법행정 업무를 보면서 내외향의 중간적 성격이 됐다. 교우관계는 원만했으나 법원에 있으면서 외부인과의 만남을 꺼려해 폭 넓은 인간관계는 만들지 못했다”고 적었다. 스스로 `촛불재판 외압’ 논란을 부른 `소통의 부재’를 인정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 지난 3월 11일 국회 본청 앞에서 민노당 의원 및 당직자들이 신영철 대법관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신 대법관은 지난해 10월 14일 형사단독판사 10여 명에게 발송한 이메일에서 “위헌제청을 한 판사의 소신이나 독립성은 지켜져야 한다. 법원이 일사불란한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나머지 사건은 현행법에 의해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적었다.
그는 이메일에서 “대법원장님도 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들었다”고 언급했다. 촛불사건 재판장 가운데 한 명인 박재영 판사가 야간집회허가 위헌 여부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하고 관련 재판을 중단한 지 나흘 만이다. 특히 11월에는 재판장들에게 세 차례나 집중적으로 이메일을 보내 재판을 독촉하는 듯한 주문을 했다.
신 대법관은 지난해 11월 6일 보낸 메일에서 “야간집회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사는 12월 5일 평의에 부쳐져, 연말 전 선고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담되는 사건들은 후임자에 넘겨주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했고, 같은 달 24일에는 “(헌법재판소가) 야간집회에 대한 위헌제청사건을 2009년 2월 공개변론한 후에 결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피고인이 위헌 여부를 다투지 않고 결과가 신병과도 관계 없다면 통상적인 방법으로 종국해 현행법에 따라 결론을 내주십사 당부한다”고 적었다.
신 대법관의 이메일이 공개되자 법원 안팎에서 `재판권 침해’라는 비판과 함께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법관의 독립을 지켜야 할 법원장이 헌법상 보장된 재판권을 `사법행정권 행사’라는 명목으로 침해했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의 진상조사결과나 신 대법관의 사퇴 여부를 떠나 사법부 전체를 뒤흔든 이번 논란은 어떤 의미에서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의 법관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을 전망이다.
김수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