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벗고 악역 입으니 ‘성숙미’ 물씬
▲ 사진제공=MBC | ||
그의 변신은 단순히 캐릭터를 통한 이미지 변신에 그치지 않는다. ‘신비주의’라는 겉옷을 벗고 ‘루머’라는 장신구도 내려놓았으며 ‘선함’으로 대변되던 메이크업도 지웠다. 철저한 악역을 통해 오히려 대중 가까이로 다가온 고현정을 파헤쳐 본다.
1단계>>악녀로의 변신
고현정의 <선덕여왕> 출연이 결정되기까지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고현정 본인의 출연 의지는 워낙 확고해 보였지만 문제는 출연료였다. <선덕여왕>이 총 50부작으로 편성된 상황이라 출연료 수준이 회당 3000만 원 이상인 고현정을 출연시킬 경우 그의 출연료만 최소 15억 원에 이른다. MBC 드라마 <히트> 당시 받은 회당 3500만 원을 기준으로 하면 고현정 한 명의 출연료만 17억 5000만 원이 된다.
그렇지만 고현정이 회당 1500만 원인 출연료 상한제를 지키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출연이 전격 결정됐다. 사실 이미 몇 차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노 개런티로 출연한 전례가 있는 터라 고현정의 출연료 자진 삭감은 놀라운 일이지만 충격적인 소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타이틀롤인 선덕여왕이 아닌 미실, 즉 주인공을 박해하는 악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더 파격적이었다.
고현정이 이영애와 함께 <선덕여왕> 주인공으로 거론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매스컴은 당연히 이들이 선덕여왕 역할을 맡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애초부터 고현정이 노린 배역은 미실이었다. 고현정으로선 사실상의 첫 악역이다. ‘선함’으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여성 톱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악녀’ 이미지를 통해 연기파로 발돋움하려는 고현정의 의지가 담긴 선택이다.
한국 사극의 대표적인 악역 캐릭터는 ‘장희빈’을 꼽을 수 있다. 80년대 이미숙과 전인화, 90년대 정선경, 2000년대 김혜수 등이 장희빈 역할을 소화하며 스타에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 바 있다. 이제 고현정이 낡은 ‘장희빈’이 아닌 새로운 ‘미실’을 통해 악녀로의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미실은 장희빈으로 대변되는 치마사극의 여성 캐릭터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강력한 여성 캐릭터다.
비로소 한국 사극에 21세기형 악녀 캐릭터가 등장한 셈인데 고현정이 특유의 선이 강렬한 연기력으로 이를 무난히 소화하고 있다. 항간에선 단선적이고 강렬하기만 한 ‘고현정표 미실’이 드라마 중반 이후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이요원과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는 드라마 중반에서 고현정의 연기력이 진정한 빛을 발할 것이라는 기대의 목소리도 크다.
2단계>>연기력 검증 완료
지난 2005년 1월 방영된 드라마 <봄날>의 첫 방송을 앞둔 시점에서 해당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가 들려준 이야기다. 우려는 우려일 뿐,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여우야 뭐하니>에선 연하남과 사랑에 빠지는 노처녀 성인잡지 기자, <히트>에선 여자 형사반장으로 출연하며 거듭해서 연기색깔에 변화를 줬다. 또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연이어 노 개런티로 출연하며 꾸준히 연기력 향상에 집중해왔다.
이런 노력들의 1차적인 결과물이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빛을 보기 시작한 것. <선덕여왕>에 함께 출연 중인 독고영재는 달라진 고현정의 모습을 “16년 전에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었지만 지금은 여장부”라고 설명한다.
<선덕여왕>의 연출을 맡고 있는 박홍균 PD는 “미실의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는 전적으로 작가에 의해 만들어져 고현정이라는 여배우가 완성시킨 것”이라며 “만약 고현정이 아니었다면 미실도 지금처럼 선명한 캐릭터로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한다.
<선덕여왕>에서 고현정의 연기가 돋보이는 까닭은 브라운관에 배우의 여유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악역이라 해서 소리를 지르고 독한 표정을 짓는 등의 악을 내품는 연기는 거의 없다. 대신 미실의 카리스마는 적절한 표정과 미소 등의 표정연기, 오히려 낮은 톤의 대사 처리 등을 통해 완성된다.
박 PD는 “솔직히 연기 잘한다는 배우들도 카메라를 타이트하게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면 표정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고현정은 얼굴 표정만으로도 온갖 감정의 미세한 표현까지도 형상화해내는 출중한 연기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3단계>>신비주의 종언
<선덕여왕> 현장 스태프들 사이에서 고현정은 ‘이웃집 누나’로 통한다. 그만큼 친근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촬영 중간중간 동료 배우들과 폰카 촬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유행어인 ‘미친 거 아냐’를 늘 입에 달고 다니며 동료 배우나 스태프에게 장난을 건다. 심지어 얼마 전엔 고현정이 계속 장난을 치자 연출자인 김근홍 PD가 확성기로 고함을 치기도 했다. 자칫 현장 분위기가 무거워질 수도 있을 상황이나 고현정이 치맛자락을 흔들며 막춤을 춰 김 PD는 물론 현장의 모든 배우와 스태프를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런 소탈한 모습은 매스컴에 소개되기도 했다. <선덕여왕> 첫 번째 회식 때의 모습이 메이킹 필름 형식으로 촬영돼 매스컴에 소개됐는데 거기에 고현정 버전의 ‘미친 거 아냐’가 촬영된 것. 회식 도중 고현정이 중국 로케이션을 다녀온 ‘칠숙’ 역할의 안길강에게 “사막에서 모래를 너무 많이 먹어 미친 거 아냐”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겨 전파를 탔다. 동료 배우 정웅인은 “촬영장에서 고현정 씨뿐만 아니라 미실파 배우 대부분이 ‘미친 거 아냐’라는 유행어를 사용해 그런 장난을 많이 친다”면서 “그런데 그 장면이 TV에 소개된 뒤 고현정 씨가 어머니께 혼났다고 하더라”는 얘길 전한다.
‘미실’ 역할로 극중 ‘미실파’ 배우들을 거느리고 있는 고현정은 회식까지 주도할 정도다. 얼마 전 독고영재 전노민 정웅인 등 ‘미실파 3인방’과 고현정이 강남 소재의 한 술집에서 회식을 가졌다. 오후 일찍 촬영이 끝났고 다음날도 촬영이 없어 술 한잔 하기 좋은 상황이라 서로 눈치를 보는데 고현정이 즉석에서 회식을 제안한 것. 이날 술자리 역시 고현정이 유쾌하게 주도했다고 한다.
사실 컴백작 <봄날> 촬영 당시에만 해도 고현정의 모습을 다소 경직돼 있었다. 동료 배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스태프들도 그를 어려워했다. 심지어 드라마 홍보를 위한 사진 촬영조차 고현정의 모습은 방송국 홍보팀이 아닌 고현정의 소속사에서 했을 정도다. 이런 모습이 고현정의 신비주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으나 사실 이런 모습은 10년여의 공백을 딛고 연예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의 적응기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선덕여왕> 촬영 현장에서의 고현정은 더 이상 신비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선덕여왕> 방영을 앞두고 출연한 ‘무릎팍도사’에서 솔직 담백한 모습을 선보이며 신비주의 종언을 선언한 고현정이 촬영 현장에서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4단계>>각종 루머와의 결별
▲ 변신의 귀재 고현정이 <선덕여왕>의 미실 역을 통해 악녀의 새로운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사진은 위부터 드라마 <모래시계> <히트>와 영화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선덕여왕> 촬영을 앞두고 고현정이 컴백 과정을 도운 후크엔터테인먼트를 떠나 강호동 유재석 등이 소속된 디초콜릿이앤티에프로 소속사를 옮겼다. 디초콜릿이앤티에프 측은 고현정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토크쇼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는데 <선덕여왕> 종영 이후가 더욱 기대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문제는 그를 둘러싼 루머에 있다. 토크쇼 진행자는 게스트들의 속내를 듣는 역할인데 이를 위해선 본인이 먼저 자신을 둘러싼 루머와 의혹들을 속 시원히 털어 놓아야 한다. MC가 자신의 이야기는 감춘 채 게스트의 속내를 들을 순 없는 법. 결국 고현정이 한 단계 더 변화하기 위해선 각종 루머와의 결별이 절박하다는 이야기다.
이 부분에서도 많은 변화가 엿보인다. 우선 고현정은 <선덕여왕> 방영에 앞서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재벌가와의 결혼과 이혼, 자신을 둘러싼 각종 루머 등에 대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100% 속 시원한 토크는 아니었지만 소속사 관계자는 물론 제작진까지 깜짝 놀랄 만큼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촬영이 끝낸 뒤 고현정이 “이제 후련하다”고 말한 게 상당히 화제가 됐을 정도다. 행동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인성과의 열애설이다. 조인성이 군 입대를 앞둔 시점에서 두 사람이 삼청동 카페에 나타나 열애설이 불거졌던 것인데 이는 오히려 그동안의 루머를 불식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군 입대를 앞둔 친한 후배 배우와 차 한잔 마시는 단순한 행위가 열애설로 확대된 까닭은 그동안 고현정이 세인들의 시선에서 너무 멀어져 있었던 탓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스타에 대한 호기심은 늘 루머의 자양분이 된다. 반면 고현정과 조인성의 눈에 보이는 공개 데이트는 잠시 열애설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동안 나돌던 연하남 배우들과의 루머를 불식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무릎팍도사’ 출연을 결정한 뒤 고현정은 소속사 관계자에게 “사생활과 신비주의로 더 많은 조명을 받는 것이 연기자로서 부담스러웠다”며 “큰 작품을 앞둔 만큼 훌훌 털고 연기로 평가받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고현정은 그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쩌면 시청자들 입장에서도 <선덕여왕>이 처음으로 진정한 배우 고현정의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