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시사저널 지목 “본때를 보여줘야”…호의적 보도엔 금전적 지원 지시
이 같은 내용은 2014년 6월 14일부터 2015년 1월 9일까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비망록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본지와 계열사인 <시사저널>을 지목하며 탄압을 지시한 내용도 있었다.
2014년 7월 15일 메모에는 대통령을 뜻하는 ‘領’(령)이라는 한자와 함께 ‘시사저널 일요신문 끝까지 밝혀내야. 피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야. 선제적으로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시사저널>은 지난 2014년 3월 22일 <[단독] 박지만 “정윤회가 날 미행했다”> 기사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남동생 박지만 EG 회장이 정윤회 씨가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미행을 당했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이에 대한 내사를 진행했지만 담당 직원이 석연치 않은 사유로 인사 조치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본지는 지난 2014년 3월 31일 <[단독추적] 여권 실세가 벌인 ‘뒷조사’ 작업> 기사를 통해 여권 실세가 주도하는 비선라인이 청와대에 파견 나와 있던 사정기관 공직자를 동원해 유력 대기업 임원 등을 뒷조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 4명은 <시사저널>을 상대로 정정보도와 8000만 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한 달 뒤엔 대통령비서실 명의로 <일요신문>을 상대로 40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일요신문>은 앞서 언급된 기사 외에도 2013년 11월 18일 <[단독 인터뷰] ‘윤석열 중징계’…감찰위원들 ‘3시간 격론’ 비공개 회의서 이런 일이…>, 2014년 4월 24일 <[단독] 청와대 민정수석실 조사받은 공기업 고위급 임원, 유서 남기고 실종>, 2014년 6월 12일 <[단독] 문창극 총리후보 친동생 ‘구원파’ 로 오해받고 있는 교회 현직 장로 재직 파장 예고> 등의 기사를 통해 박근혜정부를 꾸준히 견제하고 비판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언론으로서 아주 당연한 역할을 한 것일 뿐’이라는 게 언론계의 시각이다.
반면 비망록에는 호의적인 보도에 대해선 각종 금전적 지원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비망록에는 “VIP 관련 보도-각종 금전적 지원도 포상적 개념으로. 제재는 민정이”라고 적혀 있었고, 공영방송 이사 선임 땐 성향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을 비판한 사설에 대해서는 ‘논조 이상-이모 논설주간’을 표시해 두기도 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언론사에 대해 실제로 제재에 나섰는지는 현재 알 수 없다. 비망록의 주인공인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지난 8월 21일 간암이 악화돼 이미 사망했고, 당시 민정수석실 관계자들은 이번 일에 대해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정부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해야 할 야당 의원인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조차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렸다. 조 의원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했었다. 당시 민정수석실이 언론 제재와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느냐는 질문에 조 의원은 “당분간은 모든 언론과 접촉을 삼가고 있다. 사정이 좀 바뀌면 응하겠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민정수석실이 실제로 언론 제재에 나섰다면 어떤 방식으로 제재를 가했는지가 최대 관건이다. 언론중재위 제소,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청구 등에 그쳤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일각에선 민정수석실이 세무조사, 재판 개입, 광고 차단 등 불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언론사들을 압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비망록의 내용 중 특히 ‘선제적으로’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이 관계자는 “보도가 나간 이후 사실관계가 다르다면 언론중재위 제소나 고소고발 등을 하는 것이지 내가 아는 한 언론보도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없다”면서 “‘선제적으로’라는 단어는 불법적이고 음성적인 방법을 통해 언론을 길들이려 한 것이 아닌지 의심되는 매우 중요한 단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한 야당의 핵심관계자는 “시사저널 정기구독과 관련된 영업조직 수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주간매거진들이 하던 영업방식이었는데 유달리 시사저널에만 수사가 집중됐고 지사장을 구속하는 등 가혹했다”며 “박 대통령의 지시 중 ‘선제적으로’와 ‘발본색원’ 두 단어가 오버랩되는 건 꼭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일요신문은 해명을 듣기 위해 당시 민정수석실 관계자들과 연락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응답이 없었고, 앞서 밝힌 것처럼 조응천 당시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은 답변을 미뤘다.
한편 김영한 비망록을 최초로 보도한 <TV조선>이 당사자인 일요신문과 계열사인 시사저널을 위해 특별히 기사에선 언급되지 않았던 비망록의 일부 내용을 추가로 공개하기도 했다.
공개된 메모에는 ‘3.23 시사저널 미행보도 ‘경거망동 말라’ 領(령. 대통령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 언짢아함.’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메모에 적힌 해당 발언은 김기춘 전 실장이 2014년 12월에 했던 발언을 김 전 수석이 받아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 대통령이 약 8개월 전 기사를 다시 언급할 정도로 정윤회 비선실세 의혹보도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정윤회 씨가 최순실 씨와 마찬가지로 박근혜정부에서 비선실세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박 대통령이 왜 유독 정윤회 씨 관련보도에만 그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하루에도 정부와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가 수십 건씩 나오는데 대통령이 8개월 전 특정 언론사 기사를 콕 찍어 다시 지적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정윤회, 최순실 씨가 박근혜정부의 ‘역린’이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청와대가 비판 언론을 통제하려 한 것에 대해 언론계는 “언론 장악 문제 역시 ‘박근혜 특검’의 수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언론·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는 지난 16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검은 청와대가 앞장선 언론 유린 의혹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환균 전국언론노조위원장은 “‘언론 게이트’의 몸통이 대통령과 청와대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검은 언론 장악 문제를 수사하고, 국회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법안(방송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언론 부역자들을 청산하라”고 촉구했다.
한국기자협회 일요신문지회도 지난 17일 성명서를 내며 항의했다. 일요신문지회는 성명서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반 헌법적 언론 탄압 의혹을 명명백백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요신문지회는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면서 “박근혜 정권이 자행해 온 언론 탄압이 사실이라면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명백한 반 헌법적 행위다. 헌법질서 운운하며 퇴진을 거부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에 과연 그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일요신문지회는 또 “박근혜 정권은 권력 핵심을 겨냥한 우리 보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등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 특정 기사에 대한 청와대의 소송은 그 적법성을 떠나 이전 정권의 사례 등을 비춰볼 때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만약 일요신문 등에 대한 언론탄압이 민주주의를 짓밟으려 했던 것이라면 박근혜 정권은 즉각 퇴진함이 마땅하다”고 일갈했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 같은 의혹들에 대해 어떠한 해명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