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철벽 뚫기보다 동남아 시장 개척하라
한 드라마 외주 제작사 대표는 더 이상 ‘괜한 기대’를 갖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한류 콘텐츠 수출길을 차단한 중국이 최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가서명 이후 더욱 높은 담을 쌓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외교부는 공식적으로 이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민간 차원 대응”이라고 에둘렀다. 사드 설치에 대한 민간 차원의 불안과 불만도 크다고 덧붙였다.
배우 이영애가 출연하는 SBS ‘사임당, 빛의 일기’ 포스터. 중국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이미 한 차례 방송 시기를 미뤘다.
이 대표는 “공식적으로 이런 조치를 취한 적이 없다는 중국 측의 반응을 토대로 마치 소문만 무성하다고 기사를 쓰는 언론을 보면 화가 난다”며 “이미 한류 콘텐츠 수출은 완전히 판로가 막혔고, 중국에 진출했던 회사들도 하나둘씩 철수하고 있다. 안보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이로 인한 한류 시장의 타격은 솔직하게 얘기해주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과연 중국 내 한류의 현주소는 어떨까? 일단 최근 두 달 간 중국에서 한류 스타들이 여는 공연은 한 건도 허가받지 못했다. 한류의 시작이었던 K-팝 가수들의 설자리가 없어졌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한류 부흥의 원천이었던 드라마 시장은 어떨까? <대장금>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배우 이영애가 출연하는 SBS 드라마 <사임당>이 중국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이미 한 차례 방송 시기를 미뤘고, 최고의 한류스타로 손꼽히는 배우 이민호-전지현이 출연하는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도 중국에 수출하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두 드라마를 중국에서 못 틀면 다른 드라마는 거론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라고 반문한다.
실제로 최근 종방된 SBS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이후 중국에 팔린 드라마는 찾아볼 수 없다. 지상파 방송사와 케이블채널 등이 10편이 넘는 드라마의 심의를 요청했으나 모조리 거절당했다. 유명한 한류스타가 출연하는 드라마일수록 제재 수위가 더 높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류 콘텐츠 유통 및 수입을 제한하는 중국 내 ‘한한령’(限韓令)은 단순히 K-팝이나 드라마에 그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제작진이 중국의 작품을 연출하거나, 예능 프로그램의 합작, 한국 연예기획사 신규 투자 금지 등이 포함됐다. 전방위 제재인 셈이다.
이는 한류스타를 통한 파생 활동에도 철퇴를 가했다. 대표적인 영역이 CF다. 이민호, 김수현, 송중기 등은 중국에서 회당 최고 20억 원 안팎의 개런티를 받는 슈퍼스타다. 하지만 지난 8일 시작된 중국산 스마트폰 VIVO의 신형 모델인 x9 광고는 송중기를 모델로 쓰다가 급히 중국 배우 펑위옌(彭于晏)으로 교체했다. 한류스타를 모델로 쓰는 중국 화장품 업체들도 모델 교체를 심각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의 한류스타로 꼽히는 이민호-전지현이 출연하는 SBS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도 중국에 수출하지 못했다. ‘푸른 바다의 전설’ 스틸 컷
이런 상황에 대해, 국내 업계에서는 중국 시장을 포기한 채 제작 구조를 다시 짜고 있다. 중국 시장이 활성화되기 전 한국 드라마의 편당 제작비는 5억 원 안팎이었다. 하지만 기대작의 경우 중국에 편당 2억 안팎을 받고 팔고, 중국 업체들이 제작협찬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제작비 역시 그에 발맞춘 수준으로 상승했다.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들의 개런티를 올려주고, 한류드라마를 쓴 작가의 집필료, PD의 연출료 역시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년 초 방송을 목표로 하는 드라마 제작사나 방송사들은 회당 제작비를 2억 원가량 깎을 계획이다. 중국을 통해 충당되던 금액을 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발맞춰 한류스타들에게 주던 개런티도 낮출 수밖에 없다.
한 지상파 드라마국 고위 관계자는 “매니지먼트 관계자들은 몸값을 쉽게 올리지만, 좀처럼 낮추려 하지 않는다.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내년에는 한류스타를 쓰지 않으려는 움직임마저 감지되고 있다”며 “굳이 몸값 비싼 스타를 쓰기보다는 탄탄한 연기력으로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들을 기용해 흑자를 내는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시장을 대체할 ‘제3 시장’을 개척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일본의 우경화와 엔저 현상, 혐한 여론과 함께 일본에서 사그라진 한류의 불씨를 중국에서 되살렸듯, 중국을 대신할 만한 국가가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현재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곳은 인구가 3억 명에 육박하는 인도네시아와 1억 명을 보유한 베트남 등이다. 한국보다 시장 규모가 큰 반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발전은 더뎌 한류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를 기반으로 아시아 12개국에서 동영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웹티비아시아는 26일 국내에서 첫 시상식을 개최하고 한류를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있다. 화폐 가치를 비교했을 때, 교역을 할 경우 한국이 큰 이익을 보던 중국, 일본과 달리 동남아권은 아직 화폐 가치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한류는 ‘고급문화’라 모두가 즐길 만큼 보편화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 다른 연예계 관계자는 “이미 여러 한류스타와 연예기획사들이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 활동폭을 넓히고 있다”며 “13억 인구를 보유한 중국 시장을 완전히 대체하긴 어렵겠지만 시장 다변화를 통해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