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데자뷔…아버지 지켜준 ‘방패’ 지금 아들에겐 없다
지난 18일 오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굳은표정으로 법원에서 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지난 19일 오전 법원은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 국회에서의증언감정등에 대한 법률위반 등 혐의로 청구한 사전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영장실질심사를 맡은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부정한 청탁 및 대가성에 대한 소명 정도, 현재까지 이뤄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춰볼 때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삼성은 법원의 영장 기각 직후 “불구속 상태에서 진실을 가릴 수 있게 돼 다행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반면 특검은 이규철 특검보가 긴급 입장발표를 통해 “법원의 기각 결정은 매우 유감이지만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흔들림 없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특검보는 지난 16일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 청구 결정을 전하면서 “국가 경제 등에 미치는 영향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특검은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이득을 봤으며, 최순실 일가에 400억 원대 지원을 한 사실이 분명한 만큼 뇌물죄 적용이 가능하다고 봤다.
반면 삼성은 같은 날 미래전략실 명의의 입장자료를 내고 “특검의 결정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대가를 바라고 지원한 일은 결코 없고, 특히 합병이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특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삼성 측은 “이 부회장이 구속될 경우에 대해선 그 대안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재계 안팎에선 조심스레 영장이 기각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다. 특검 수사 대상에 오른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민 여론 말고 순수하게 법리적으로만 보면 영장 발부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대통령을 겨냥한 수사에 삼성이 엮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신병 처리가 다른 대기업 수사의 가이드라인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점에서 기각을 기대하는 곳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첫 삼성전자 수요 사장단 협의회가 열린 지난 4일 오전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직원들이 출입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실제 삼성은 이 부회장 구속 이후 상황에 대한 ‘플랜B’는 마련해 놓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이 부회장은 지난해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해체를 공언한 바 있다. 또 그룹 2인자인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3인자 격인 장충기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등도 기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앞의 삼성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이 부회장 경영 공백 시 위기를 수습할 컨트롤타워가 부재하다”며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그룹 임원 인사가 미뤄진 데다 ‘넘버 2’인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도 재판에 불려 다닐 텐데 과연 위기 대응이 가능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재계 일각에선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김종중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사장) 등이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삼성을 관리할 것이란 전망이 대두됐다. 이 부회장의 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그룹 내 역할이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는 이 부회장(지분율 17.23%), 2대 주주는 이부진 사장(5.51%)과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5.51%)이다. 이 가운데 이서현 사장은 남편인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이 장시호 씨가 운영하는 동계영재스포츠센터 후원에 관여한 바 있기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부진 사장의 ‘등판’은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생길 수 있다는 면에서 우려가 적지 않다. 때문에 이 부회장의 어머니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홍 관장은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지난해 9월 전후로는 조금씩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재계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일부 임원은 바라지 않겠지만 향후 그룹 인사 등과 관련해 홍 관장의 의중이 반영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홍 관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0.77%로 이 부회장의 지분(0.6%)보다 많다.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대치동 특검사무실에 소환되고 있다. 고성준 기자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특검은 일찌감치 이 부회장을 구속수사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뒤 ‘2인자’인 최지성 실장은 불구속 기소하는 ‘강수’를 택했다. 현재 이 부회장에겐 이학수 실장 같은 ‘방패’가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그나마 이건희 회장 때는 사건을 책임져 줄 사람(이학수 실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며 “재판에서 무죄를 입증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으로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전례를 들어 이 부회장이 한시적으로 등기이사 직함을 내려놓고 ‘사장단협의체’에 경영을 맡길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 비자금 특검 당시 이건희 회장은 불구속 기소됐음에도 미래전략실의 전신인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고, 사장단협의체 의장으로 비서실장 출신인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내세웠다.
이수빈 회장은 현재 삼성 내에서 이건희 회장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회장 직함을 갖고 있으며, 2014년부터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매년 ‘자랑스런 삼성인상’ 행사를 주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건희의 사람’이란 인식이 강한 데다 갤럭시노트7 발화 원인 규명, 삼성물산에 대한 엘리엇의 소송 등 복잡한 그룹 현안을 챙기기에는 비교적 고령(78세)이라는 평가가 있다. 총수 경력이 짧은 이 부회장에게는 이수빈 회장 같은 ‘가신’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부회장의 경영 공백 시 삼성이 선장을 잃고 표류할 것”이란 주장이 과언만은 아닌 이유다.
삼성으로서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특검의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앞서 ‘최순실 사건’을 수사한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공소장에서 삼성을 대통령의 강요에 따른 피해자로 적시했다. 반면 특검은 이 부회장을 공범으로 지목했지만 영장을 발부받는 데 실패했다. 영장을 재청구하더라도 이 부회장이 구속될 가능성은 낮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검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특검의 배수진이 오히려 독이 됐다”며 “뇌물죄 혐의에 대한 소명 부족으로 영장이 기각된 만큼 이 부회장을 공범으로 기소하는 데 엄청난 부담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