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현장 군인 “최세창 전 장관이 사격 명령” 증언…최 전 장관 “그런 적 없다”
지난달 1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광주시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에서 사격한 상황으로 유력하게 추정한다”는 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맞춰 당시 군에서 근무하며 광주 상무대에서 대기했던 A 씨는 지난달 17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980년 5월 21일 당시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이었던 최세창 전 장관이 헬기 사격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교가 이를 거부해 한 차례 소동을 빚기도 했다”고 밝혔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당시 군이 쏜 총탄 자국에 대한 감식을 실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지난해 12월 14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 10층 현장에서 발견된 총탄 자국에 붉은 스티커를 붙이고 총알이 발사된 방향을 표시해 놓았다. 현장에서 국과수 관계자는 “옛 전남도청 방향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선회하는 헬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5월 21일 최세창 전 장관이 사격 명령을 내렸던 장면 역시 A 씨는 정확하게 설명했다. A 씨는 “헬기가 도착한 뒤 최세창 당시 제3공수특전여단장이 상무대 잔디밭 위에서 지원 온 61항공단장 B 대령에게 ‘지금 당장 출동해서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제61항공단에서 지원 온 UH-1H는 7.62㎜ M60 기관총이 설치돼 있었다. UH-1H는 수송 헬기지만 적이 지상에서 총을 쏠 경우를 대비해 M60을 싣고 다녔다“고 설명했다.
B 대령은 최세창 전 장관의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A 씨는 ”B 대령이 최세창 전 장관에게 ‘못 쏘겠다. 우리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불복했다. 최 전 장관은 바로 권총을 꺼낼 듯한 몸짓으로 ‘왜 못하냐. 내 말 들어라’라고 사격을 강제했다. B 대령은 ‘쏘려면 쏴라. 네가 내 상관이냐? 난 네 명령을 받을 수 없다’고 최 전 장관의 명령을 거부하며 한 차례 실랑이를 벌였다”고 말했다.
제61항공단이 출동을 거부하자 최세창 전 장관은 제31항공단에게 또 다시 사격을 지시했다. A 씨는 “제31항공단은 최세창 전 장관의 명령을 받고 공격 헬기인 500MD를 몰아 두 차례 광주 상공을 비행했다. 제31항공단 C 소령은 500MD에 7.62㎜ 총을 장착한 뒤 전일빌딩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격은 할 수 없었다. 사격을 시도했으나 화기 문제로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C 소령은 즉시 복귀했다”고 했다.
이후 500MD는 한 차례 더 떴다. 정찰 목적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시민군의 총격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A 씨는 “31항공단이 500MD를 몰아 정찰 목적으로 1회 더 비행했다. 조종사가 돌아와서 ‘도청 등지에서 시민군이 기관총인 캘리버 50으로 헬기를 향해 사격했다. 예광탄이 섞여 있어 눈으로 총알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고 했다”고 전했다.
A 씨는 헬기 사격이 실제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없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A 씨는 ”사격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있었다면 군 안에서 소문이 퍼져 모를 수가 없다”며 “지원 왔던 제61항공단의 UH-1H는 뜨지 않았고 제31항공단의 500MD는 사격을 시도했지만 화기 문제로 사격하지 못했다. 헬기 사격이 만약 있었다면 제61항공단이나 제31항공단이 아닌 다른 부대의 사격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국방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 은폐 의혹에 또 다시 휩싸였다. 국방부는 당시 헬기가 2회 기동됐다고 최근 밝혔지만 3회 이상 기동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A 씨 증언에 따른 2회 기동은 모두 공격 헬기인 500MD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공개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에는 수송 헬기 UH-1H가 포착돼 있다. 최소한 500MD 2회 기동에 당시 사진에 찍힌 UH-1H 기동 등 3회의 헬기 기동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 당시 광주 상공에 떴던 수송 헬기 UH-1H. 연합뉴스
국방부는 그간 “군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해 왔지만 최근 “헬기 기동을 2회 한 바 있다”고 인정했다. 지난달 13일 국방부는 “기본적으로 군에서 갖고 있는 자료에는 헬기가 두 차례 기동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사격이 이뤄졌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에 사격이 이뤄졌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제까지 확인된 바로 당시 광주에는 헬기가 최소 13대 배치돼 있었다.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가 지난달 19일 발표한 ’1980년 5월 28일자 계엄 상황일지에 광주에 파견된 군 항공기 복귀 보고기록‘에 따르면 당시 광주에는 공격 헬기 AH-1J 2대, 공격 헬기 500MD 6대, 수송 헬기 UH-1H 5대 등 헬기 13대가 파견돼 있었다.
한편 최세창 전 장관은 사격 명령을 부인하고 나섰다. 최근 최 전 장관은 “그런 비슷한 일도 없었고 헬기 조종사를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최세창 전 국방부 장관은 누구? 12·12 쿠데타 주역 최세창 전 장관은 하나회의 일원으로 12·12 군사반란에 참여한 신군부 인사다. 전두환 정권에서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뒤 노태우 정권이었던 1991년 1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7년 준장으로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에 임명됐다. 1979년 10월의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5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지휘관으로 투입된 바 있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가담, 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으나 1998년 8월 15일 사면됐다. [최] |
헬기 사격, 최초 명령자 따로 있다? 최세창 전 국방장관의 헬기 사격 명령 증언이 나오면서 최초의 사격 명령자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특히 황영시 중장은 앞서의 1988년 5공 청문회부터 ‘광주진압 작전’ 전면에 나서 총지휘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시민을 향한 첫 발포 명령을 내린 군 지휘부가 누군지 몰라도 헬기 사격은 황 참모차장 원지시였다는 게 당시 군 관계자의 증언이다. 이 증언에 따르면 황 참모차장은 정식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최세창 전 장관이 황 참모차장의 명령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1996년 1월 6일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기석 당시 전교사 부사령관은 “5월 20일부터 26일 사이 황영시 중장이 전차와 신군부 측에서 공급한 무장헬기 15대 등을 이용해 신속히 진압작전을 수행하라고 수차례 이야기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그 지시가 곧 전차의 발포와 무장헬기에 의한 기총소사를 포함한다”고 덧붙였다. 김기석 부사령관은 1996년 7월 전두환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에 대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보다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그는 “황영시 중장이 광주진압 작전을 주도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며 “황 중장은 사단-전교사-2군-육군본부로 이어지는 정식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2단계, 3단계를 건너뛰어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광주사태 진압 중 전차나 무장헬기를 동원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진압용이 아닌 위력 시위용으로 동원했다가 진압과정에서 잘못된 사례가 있다. 예컨대 핸들 조작을 잘못하는 바람에 인도로 뛰어들었는가 하면 위협사격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는 수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황영시 중장이 정식지휘체계를 거치지 않고 작전을 지시한 정황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황 중장은 이구호 당시 기갑학교장에게 “탱크, 전차로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 기갑학교장이 “대량 인명 피해가 우려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자 황 중장은 욕설을 하며 공격을 지시했다. 이 기갑학교장은 “그렇다면 구두 지시 말고 정식 지휘 계통을 거쳐 명령을 해달라”며 재차 거부했다. 이러한 정황은 1997년 4월 17일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한 대법원 판결문에도 나온다. 판결문에 따르면 작전 계획은 육군본부작전지침으로 완성됐고 전두환, 황영시 등 신군부 주축 세력이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황 참모차장이 광주로 직접 내려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사령관 소준열 소장에게 결정사항을 전달했다. 그러나 황 참모차장은 검찰조사 등에서 일관되게 “헬기 사격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
“벽에도 지붕에도 총알세례”…시민 향한 사격, 자위권 발동? 계획된 작전? 이번 헬기 사격 공식 확인으로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주장은 거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1988년 일명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이뤄진 ‘자위권 발동‘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하지만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떠나 헬기 사격이 진행됐다면 이는 당시 계엄군이 ‘계획된 작전’을 감행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시각이다. # 37년 만에 맞춘 퍼즐 한 조각 국과수는 지난해 9월 전일빌딩 외벽부터 내부까지 모든 층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기간만 총 3개월을 넘었다. 같은 해 12월 13일 김동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안전과 총기연구실장은 전일빌딩 10층 ‘영상 데이터베이스(DB) 사업부’라고 적힌 사무실에서 발견한 흔적을 ’탄흔‘이라고 공식화했다. 한 달 뒤엔 공식 보고서를 내고 “헬기에서 쏜 탄환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5·18민주화운동 37년 만에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헬기 총격을 가했다는 사실이 정부 기관의 공식 조사에서 확인된 셈이다. 국과수는 3차례 조사 과정에서 총탄 흔적 185개를 찾았다. 특히 가장 높은 층인 10층 내부에서 탄흔 150개 이상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다. 국과수는 “수평 또는 하향 각도로 사격이 이뤄진 만큼 최소 10층 이상의 높이에서 사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전일빌딩 앞에는 10층 이상의 건물이 없었으므로 헬기와 같은 비행체에서 발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표했다. 탄흔의 각도와 방향을 봤을 때 헬기 사격이 유력하다는 말이다. 국과수는 10층 창문 바로 앞에 위치한 기둥에서 발견된 집중 사격 흔적을 근거로 “헬기가 호버링 상태(일정한 고도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사격한 상황이 유력하게 추정된다”고 밝혔다. 5·18 관련 단체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은 기둥 집중 사격에 대해 헬기에서 전일빌딩 기둥을 사람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했거나 도청에 결집한 시민군에게 위협사격을 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과수는 헬기에서 기관총 사격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전일빌딩 10층 천장에 나타난 탄흔의 생성 방향은 한 지점에서 좌우 방사형으로 펼쳐진 일정한 형태였다. UH-1H 헬기의 양쪽 문에 거치된 M60 기관총의 발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과수는 탄흔 공식화 이후 “일부 탄환이 전일빌딩 10층 천장 공간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탄환이 발견되면 사용 총기류에 대한 규명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최근 광주시는 진실규명을 위해 국과수에 추가 발굴 조사를 의뢰했다. # 그들은 말하는 ‘진실’ 국방부와 당시 군 지휘관 등은 이제껏 헬기 사격을 부인해 왔다. 이는 헬기 사격 목격자와 군 관계자들의 증언, 공개된 문건의 내용과 대치된다. 5·18기념재단이 제공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당시 헬기를 광주에 급파했던 육군1항공여단 31항공단 소속 헬기조종사는 “5월 24일 공수부대 이동로를 엄호하다가 연료 재보급 중에 무전으로 11여단장이었던 최웅 준장이 ‘병력 이동 중에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무차별 제압사격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즉각 출동해 현장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다만 그는 “망원경으로 확인해보니 아군으로 확인돼 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다. 검찰 역시 1995년 “군이 가지고 있는 자료 가운데 헬기 사격을 입증할 기록이나 대량인명피해, 피탄 흔적이 없다”고 결론 냈다. 하지만 이날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던 서 아무개 씨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지난 19일 <일요신문>과 만나 “1980년 5월 24일에는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려 몸을 숨겼다. 나중에 남편이 돌아와 확인해 보니 지붕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기와장 틈으로 하늘이 보였다. 벽에도 수도 없는 총알들이 박혀있었다”고 진술했다. 정수만 전 5·18 민주유공자유족회장(현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이 공개한 ‘광주 소요사태 분석 교훈집’에서도 헬기 사격 정황이 발견됐다. 교훈집에는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헬기 사용의 문제점으로 △불확실한 표적에 공중사격 요청 △표적지시의 불확실 △요망표적 위치에 아군병력 배치 △공중사격 감행시 피해 확대 우려 등이 담겨있었다. 교훈집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었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육군본부에 제출한 문서였다. 이 외에도 헬기 사격 목격담은 꾸준히 나왔다. 처음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공식화된 것은 1989년 2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5·18 진상규명 청문회 때였다. 고(故) 조비오 신부는 청문회에서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30분에서 2시 사이 전남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헬기가 날아가면서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3차례에 걸쳐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5월 21일 오후 1시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처음 발포를 했던 시점이다. 당시 시민들은 계엄군과 대치하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군 관계자들의 증언도 나왔다. 1995년 전두환 등의 내란목적살인 혐의를 수사하던 검찰의 진술조서를 보면, 3해역사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김 아무개 대위는 “5월 21일 선교사로 광주에 있었던 미국인 피터슨 목사의 집을 찾았다. ‘어떻게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사격을 할 수가 있느냐’는 목사의 말에 상공을 보니 헬기에서 사격을 하고 있었는데 ‘타다닥’하는 사격 소리가 3번 정도 들렸던 것 같다. 그와 동시에 헬기에서 ‘파다닥’하는 불빛이 보였다”고 진술했다. 이어 “헬기 동체에 부착돼 있는 기관총이나 발칸으로 사격한 것보다는 헬기 탑승자가 시민들에게 위협사격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목격된 헬기에서 사격이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5·18기념재단 측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도청 인근 주택 3층 집에 머물고 있었거나 4층 건물 옥상에 머물던 시민이 총에 맞아 사망한 기록이 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