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일) 효창원 가는 길, UCC 상영, 토크콘서트 등
- (14일)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소원’ 영상물 SNS 통해 배포
- 이봉창 의사 기념관 건립도 추진…효창4구역 재개발 기부채납지
- 이 의사 생애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 등 조성
[서울=일요신문] 김정훈 기자= 열사(烈士)의 충혼이 깃든 용산구(구청장 성장현)가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와 이봉창 의사 기념관 건립 등 지방정부 차원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에 힘을 쏟아 눈길을 끈다.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정에서 재판장 마나베 주조(眞鍋十藏)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피고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이에게 초콜릿을 주고받는 2월 14일. 이날은 107년 전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사형선고일’이기도 하다.
구는 오는 13,14일 양일간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갖는다.
13일에는 용산구 효창공원 내 안 의사의 가묘(假墓)를 찾아 단체헌화를 하는 ‘효창원 가는 길’과 ‘안중근 의사 UCC 상영’, ‘우리 가슴 속의 안중근 토크콘서트’를 진행한다. 14일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소원’ 영상물을 SNS로 배포할 예정이다.
‘효창원 가는 길’은 13일 오전 9시 30분에 진행한다. 성장현 용산구청장과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학생 등 40여명이 함께 효창공원을 찾아 안중근 의사 가묘에 단체 헌화를 한다. 안중근 의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유해의 조속한 반장(返葬)을 기원하는 행사다.
오전 10시 30분에는 용산아트홀 소극장에서 지역 고등학생들이 직접 만든 ‘안중근 의사 UCC’를 세편 연달아 상영한다. 용산공고, 오산고, 서울디지텍고 학생 11명이 각각 동영상 제작에 참여했으며 구는 지난 20일 이들 학생들을 ‘명예 안중근 의사 지킴이’로 임명했다.
이어 ‘우리 가슴 속의 안중근 토크콘서트’가 12시까지 진행된다. 서 교수와 독립기념관 김주용 박사가 패널로 참여하며 성 구청장도 구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과 그간의 성과, 향후 계획 등을 밝힌다. 우리 역사에 관심 있는 청년과 구민 300여명이 자리하며 핸드프린팅 등 이벤트도 진행한다.
사형선고일 당일인 14일 아침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소원’ 영상물을 용산구와 서 교수의 SNS를 통해 배포한다. 구와 서 교수가 함께 제작에 참여했으며 국제적 홍보를 위해 영어판도 함께 배포한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 전 두 동생과 빌렘 신부에게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안 의사의 마지막 소원은 ‘대한독립’과 ‘고국귀환’이었다”며 “안 의사의 유해를 하루속히 발굴하고 효창원 빈묘에 제대로 모시기 위해서는 범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청년기에는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다. 1895년 카톨릭에 입교하고 신식 학문을 접했다. 1906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1907년부터 의병운동에 참여해 연해주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으로 활동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고 구국투쟁을 맹세했다. 그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도착하자 안 의사는 이토를 사살하고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돼 일본 관헌에 넘겨진다.
이듬해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되고 3월 26일 이 의사는 32세의 짧은 일기를 끝으로 처형당한다. 옥중에서 자서전(안응칠 역사)과 미완의 ‘동양평화론’, 붓글씨 200여점을 남겼다.
▲ 안중근 의사 가묘
안 의사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뤼순감옥 공공묘지’는 잡목이 우거진 나지막한 야산이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 뤼순감옥에서 죽은 대부분의 수형자가 이곳에 묻혔다. 주변 지역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유해 발굴이 시급한 상황이다.
안 의사 가묘는 용산구 효창공원 내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지난 1946년 백범 김구 선생 주도로 조성됐다. 묘단 아래에는 ‘유방백세(遺芳百世·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다)’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봉창 의사 기념관 건립】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백범일지>에 남겨진 이봉창 의사의 이야기다.
용산구는 지역의 대표적 독립투사인 이봉창 의사(1901~1932)의 생애를 대중에 알리기 위한 작은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 이봉창 의사 기념관 조성예정지
기념관 조성 예정지는 이 의사의 옛집이 자리했던 효창동 118번지 인근이다. 현재 이 주변은 효창4구역 주택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며 재개발조합은 내년 말 아파트 준공과 함께 479.1㎡ 규모의 소공원을 구에 기부채납할 예정이다.
구는 이에 앞서 조합과 서울시 협의를 거쳐 해당 소공원을 ‘역사공원’으로 용도 변경하고 이곳에 2018년까지 연면적 60㎡ 이내로 이 의사 기념관을 건립코자 한다.
당초 서울시는 아파트가 들어선 뒤 옛집 위치에 해당하는 아파트 동 앞에 집터 표석만 설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구는 조합과의 협상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제국의 심장’ 일왕 폭사를 꾀하는 등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그의 생애가 일반에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는 이유에서다. 기념관 내부에는 이 의사의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 의사는 지난 1901년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신흥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11년 청파동에 있던 문창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가세가 기울어 효창동으로 이사했으며 과자가게, 약국 점원 등으로 일했다.
1925년 이 의사는 구직을 위해 일본 오사카로 떠났고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여러 직장을 전전한다. 1928년 이 의사는 교토에서 열린 일왕 즉위식을 찾아갔으나 한글이 적힌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갇히고 만다.
1931년 이 의사는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상하이로 떠나 임시정부를 찾았다. 이 의사는 임정 요인들에게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라고 따졌다.
이후 이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단원이 된다. 의거일은 1932년 1월 8일로 정해졌다. 그는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불행부중(不幸不中). 비록 의거는 실패로 끝났지만 윤봉길을 비롯한 조선의 젊은이들이 임시정부로 모여드는 등 침체된 항일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이봉창 의사 기념관 투시도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용산구는 백범 김구 선생은 물론 이봉창 의사 등 7위 선열의 묘소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자리해 있는 호국도시”라며 “안 의사 추모행사와 이 의사 기념관 건립으로 용산구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이 커다란 진전을 이룰 것”이라고 전했다.
구는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와 ‘용산을 그리다’와 같이 지역사를 다룬 서적을 발간하고 유관순 열사가 안장됐던 이태원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 관련 사업을 벌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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