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늪에 빠져…비참한 최후 맞다
왕비 메누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그림.
어느 날 아마라푸라 궁에 큰 새 한 마리가 입에 붉은색 론지(미얀마식 치마)를 물고 날아왔습니다. 이를 본 신하들이 신기하게 여겼으나 그대로 두었더니, 그 새는 왕비가 머무는 지붕 위에 론지를 놓고 갔습니다. 당시 보타파야 왕은 론지의 주인공을 찾아내 뒷조사를 해보니 신분이 낮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부친이 1000명의 공무원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비의 시녀로 보냈습니다. 그 어린 궁녀가 바로 메누입니다. 10대였던 메누는 들어오자마자 왕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총명하고 일도 잘하고 게다가 예뻤습니다. 궁안의 지체 있는 남자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나중 왕이 된 세자도 있었습니다. 세자는 부인이 있었지만 메누에게 은밀한 편지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메누는 ‘당신이 왕이 되면 나를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하면 그 마음을 받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세자는 왕이 되어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왕이 바지도(Ba Gyi Daw) 왕입니다. 세자의 첫 부인은 왕자 나웅양을 낳자마자 죽었습니다. 이렇게 메누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메누는 왕비가 되긴 했지만 왕실 가문이 아니어서 신하들과 백성들의 신임을 받진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고향 사람과 친척들을 높은 직책에 많이 임용하여 궁궐 안에서 힘을 키웠습니다. 특히 자신의 동생 마웅오(Maung O)를 대군 자리에까지 올려놓았습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됩니다. 바지도 왕은 자신의 아들, 메누의 동생, 자신의 동생 따야와디(Tharyarwaddy) 그 누구도 후계자로 정하지 않은 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또 바지도 왕 시대에 영국과 첫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과 나라의 모든 일은 메누가 결정했습니다. 왕이 병이 들어 모든 일은 왕비를 만나야 해결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1825년 4월에 미얀마 국민들이 존경하는 마하반듀라(Mahar Vandu La) 장군이 전사했습니다. 총과 화살의 싸움이었지만 영국과 사력을 다한 긴 전쟁이었습니다.
바지도 왕과 왕비 메누(오른쪽)의 당시 모습.
1837년. 왕의 동생 따야와디는 군사를 이끌고 잉와 왕궁으로 쳐들어가고 바지도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던 해입니다. 메누는 바지도 왕, 자신의 딸과 함께 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슬퍼하지 않고 당당히 떠났다고 전합니다. 메누의 동생은 감옥에 갇혔고 왕세자는 반란죄로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왕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메누는 군사 수뇌부에 반역하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리지만 모두 체포되고 반란죄를 적용해 메누의 동생과 가족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최후로 메누에게도 물에 던져지는 처형이 내려졌습니다. 끌려가던 메누는 죽기 전에 소원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존경하는 우보테 스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는 청이었습니다. 스님과 만난 메누는 ‘오늘 제 인생 마지막으로 스님을 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소에 말씀을 하지 않던 스님이 메누의 이름을 부르며 ‘빚이 있으면 반드시 갚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소엔 자신에게 말을 아끼던 분이 자신의 이름까지 부르며 말씀을 하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형장으로 걸어갔다고 전합니다. ‘이제 더 이상 원할 게 없다. 이제 죽어도 된다’는 말과 함께.
아마라뿌라. 왕비 메누가 물에 던져진 마을입니다. 고대어로 ‘불멸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불멸’을 꿈꾸던 메누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 민돈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바로 씬퓨마신(Sinphyumashin) 왕비입니다. 씬퓨마신의 딸은 또 버마의 마지막 왕 티보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바로 수파라얏(Supayalat)입니다. 이 왕비를 마지막으로 ‘불멸의 시대’는 가고 식민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