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치료 안하고 유기·방치한 책임 피할 수 없어
약을 쓰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모임 ‘안아키’ 커뮤니티의 배너. 사진=안아키 커뮤니티 캡처
무정부주의자를 뜻하는 ‘아나키스트(Anarchist)’가 아니다. ‘안아키’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부모들을 뜻하는 이들만의 신조어다. 안아키란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의 줄임말이다. 예방접종 부작용을 우려해 필수 접종 외에는 맞히지 않거나, 아예 예방접종 자체를 거부하는 ‘안예모(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안아키는 이들보다 더욱 극단적이다. 이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지니고 있는 자연 치유력을 믿는다. 의약품에 의존하지 않고 신체가 스스로 병을 이겨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안아키’는 대구 수성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의사 K 원장(여·54)을 운영자로 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지난 2014~2015년 사이 급성장했다. K 원장은 자신을 지지하는 안아키스트들을 위해 지난해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책까지 출판한 작가이기도 하다. 2015년에는 SBS 스페셜 <항생제의 두 얼굴>편에 출연해 자신의 양육과 한의학 철학에 대해서 밝히기도 했다.
K 원장은 자신의 책이나 강의, 방송 등을 통해 늘 같은 말을 한다. 안아키를 선택했다면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 아무리 아이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울어도 병원에 곧바로 데려가거나 항생제를 함부로 먹이지 말 것을 강조한다. K 원장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지금 아이는 ‘몸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공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엄마가 나서서 애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안아키스트들이 신봉하는 이 ‘몸 공부’는 아이가 약 없이 고통을 견뎌가며 면역력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심한 화상을 입은 아기에게 온수욕과 열찜질 치료법을 가르쳐주는 맘 닥터. 사진=안아키 커뮤니티 캡처
K 원장의 교육을 받은 안아키스트들의 신념은 청출어람이다. 초기에 K 원장은 “항생제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사용하더라도 적은 양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이후 안아키스트들은 ‘No 항생제 No 로션 No 예방접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강성 안아키스트들이 됐다.
안아키 커뮤니티에 별도로 마련된 ‘맘 닥터’ 게시판. 이들은 K원장이 주장하는 의학 지식을 공부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안아키 커뮤니티 캡처
이들 맘 닥터들은 열이 40도가 넘어가는 긴급한 상황에도 절대 해열제를 먹이지 않고, 악성 아토피로 얼굴 피부가 모두 벗겨져도 로션을 바르지 않도록 충고한다. 이른바 ‘안아키식 화상 치료법’도 있다.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이들을 40~50도의 뜨거운 물에 1시간씩 환부를 담그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고온으로 입은 화상이기 때문에 그보다 저온을 이용해 몸에 스며든 열을 빼낼 수 있다는 주장에서 출발했다. 화상으로 피부가 심하게 벗겨진 아이들은 계속되는 열 찜질로 환부가 아물지 않고 2차 감염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의 이런 걱정 어린 게시물에 달리는 맘 닥터들의 댓글은 “잘하고 있다” “아이가 열심히 몸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황당한 내용뿐이다.
더욱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모든 의약품이나 화학약품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이들은 K 원장이 직접 만든 자연주의 상품이라는 샴푸, 비누 등을 공동구매하고, K 원장이 소개한 업체의 숯가루를 구매해 아이들에게 먹인다. 화학약품이나 약을 쓰지 않는 대신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모든 것을 K 원장을 통해 구매한다는 것. 이렇다 보니 자신의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잘못된 의료 지식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K 원장이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S화장품 판매사이트. 안아키 회원들은 이곳에서 비누나 생필품 등을 구매한다. 사진=S화장품 홈페이지 캡처
이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이들의 사진과 이에 대한 황당한 조언, K 원장의 상품 판매 사실 등이 인터넷 상에서 공개되자, 시민단체들이 안아키 커뮤니티를 즉각 고발하고 나섰다. 아동학대방지시민모임 공혜정 대표는 <일요신문>과의 통화를 통해 “의사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아픈 아이의 증상을 판단하고 처방을 하는 것 자체가 아동학대”라며 “안아키 회원들은 전염병이나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도 어처구니없는 처방을 내려주며 절대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해 치료시기를 놓치도록 만들고 있다. 더구나 이 같은 사이비 닥터들을 만들어내는 게 운영자인 K 원장인 만큼 그에 대해서도 엄정한 법적 조치가 내려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법조 관계자들은 이 사건에 어떤 혐의가 적용된다고 판단하고 있을까. 태경종합법률사무소 정주섭 변호사는 “잘못된 신념이나 지식에 따라서 의학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방치하는 행위는 유기행위에 해당한다”라며 “특히 부모가 신체에 대한 위험을 극복할 능력이 전혀 없는 아동을 유기하는 행위는 아동학대범죄로 가중 처벌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유기행위로 인해 아동을 불구 또는 난치의 질병에 이르게 할 때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
다만 이 같은 아동학대 혐의는 치료를 방치하는 행위를 실제로 행한 부모에게만 적용될 뿐, 맘 닥터 또는 K 원장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 정 변호사는 “단순히 부모들에게 자연치유법을 제공하는 행위를 부모와 공동으로 아동학대 행위를 했다거나 교사 또는 방조 행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을 처벌하기는 어렵다”라며 “다만 K 원장이 부모들에게 소위 ‘자연주의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의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항을 믿도록 했다면 이는 사기죄에 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대한한의사협회는 지난 2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K 원장의 무면허의료행위 등 불법사항이 적발될 경우 사법기관에 고발해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이 같이 신고·고발이 이어지자 K 원장은 지난 3일 6만여 명의 회원들을 모두 강제로 탈퇴시키고 안아키 커뮤니티를 폐쇄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