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와 엇박자…목소리 낼 수 있을까
2014년 11월 은행연 회장으로 취임한 하 회장은 그간 금융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2016년 1월 출범한 한국신용정보원이다. 한국신용정보원은 은행연, 여신금융협회, 생명보험협회 등 금융기관에 흩어져 보관되던 신용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기관이다. 설립 당시 별도의 기구로 만들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하 회장의 강력한 주장으로 은행연 산하기관이 됐다. 하 회장은 한국신용정보원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다.
지난해 초 시중은행에서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설이 가능해진 것도 하 회장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임형 계좌란 금융회사가 고객이 맡긴 돈으로 자유롭게 투자에 나설 수 있는 계좌로 기존에는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사에서만 가능했다. 당시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융위원회(금융위)는 하 회장의 의견에 따라 ISA에 한해 시중은행의 일임형 계좌 개설을 허용했다.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이 추진 중인 성과연봉제 도입이 문 대통령의 ‘성과연봉제 폐지 후 원점 재검토’ 공약으로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하지만 하 회장의 영향력 뒤에는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는 의혹이 끝없이 제기돼 왔다. 하 회장은 은행연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에도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의 낙하산 인사라는 구설에 시달렸다. 정 이사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치면서 금융권 실세로 활동해온 인물이다. 하 회장이 취임할 당시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은 “금융산업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금융위의 권위마저 무너뜨린 중대한 권력 비리”라며 “금융당국은 은행연 회장 인선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은행연과 회원사들이 자율적으로 금융인들의 의견을 모아 은행연 회장을 선임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 회장은 과거 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과도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이다. 2007년 씨티은행장으로 재직하던 하 회장은 여성지도자를 발굴한다는 목적으로 조 전 장관을 씨티은행 부행장으로 발탁했다. 이밖에 경기고등학교 1년 선배인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이 그의 대표적인 인맥으로 꼽힌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하 회장은 오랜 기간 관변과 밀착한 처세술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했다.
하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금융권 성과연봉제 도입도 적극 지지했다. 금융노조는 “하 회장은 기획재정부(기재부)가 공기업에 제시한 방안보다 더 강화된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안을 민간은행에 도입해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며 “하 회장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금융노동자들을 짓밟으려 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하 회장은 성과연봉제 도입을 주장하는 것이 정치권 압박과 상관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실제 그는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성과연봉제 도입에 대한 의견을 꺾지 않고 있다. 은행연 관계자는 “성과연봉제 도입은 시장의 시대적인 흐름에 맞춘 주장이지 정권의 압박과 상관없다”며 “호봉제 체계는 현재 시장 상황에 맞지 않아 개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금융권 일부에서는 다르게 해석한다. 임기가 오는 11월까지인 하 회장은 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연임은커녕 남은 임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금융권 관계자는 “적폐 청산을 외친 문 대통령이 정찬우 이사장 등 논란이 있는 금융권 인사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하 회장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하 회장의 존립근거 중 하나인 성과연봉제를 이제 와서 철회하면 논란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전국은행연합회 건물.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하지만 하 회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어 기존 성과연봉제의 추진은 어려워 보인다. 시중은행들은 지난 3월까지 은행별로 성과연봉제 도입 계획을 발표하기로 했으나 아직까지 발표한 은행은 한 곳도 없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은행연에서 주도적으로 성과연봉제 도입을 추진한다고 해서 회원사인 은행들이 무조건 따라갈 이유는 없다”며 “현재는 사측이나 노조 모두 특별한 입장을 내지 않으면서 유야무야 넘어가 보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에 하 회장은 문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성과연봉제 도입을 주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앞의 금융권 관계자는 “정권 초기 정부가 모든 것에 일일이 개입하기 어려운 데다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아 하 회장이 중도 퇴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문제는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인데, 문 대통령이 성과연봉제에 대해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만큼 재검토 방안에 적극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 문 대통령 측과 관계를 쌓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지난해 말 하 회장은 금융노조와 직접 만나면서 성과연봉제 관련 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성과연봉제 필요성에 대해 주장만 할 뿐 행동에 옮기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려는 시도도 보인다. 하 회장은 지난 6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연공서열로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대선후보는 없다”고만 할 뿐, 문 대통령 생각에 크게 반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