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존심에 금 가는 소리…?
▲ ‘일본 가요계의 대모’로 불리는 와다 아키코와 그가 한국계임을 밝힌 <주간문춘>의 보도들. | ||
일본인들이 ‘가요계의 여제’라 떠받들고 있으며 연예계 밖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와다 아키코’가 최근 ‘출생의 비밀’을 밝혀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그것도 사적인 술자리도 아니고 우익성향의 <주간문춘>에서 말이다.
잡지 담당자들이야 제처놓고, 각 가정에 배달되는 아침신문이나 출근길 전차 안에서 잡지 광고를 본 일본인들은 졸린 눈이 번쩍 떠지고도 남았다. 기사 내용을 읽기도 전에 ‘실록, 와다 아키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놀랐다’는 헤드라인만 가지고도 일본인들에게 던지는 충격파는 엄청났다.
그녀는 키가 크다. 174cm라 한다. 어지간한 체격의 남자들보다 손도 크고 발도 크다. 앞머리를 내린 동그란 실루엣의 짧은 머리는 20년 이상 한결같다. 외국 공항의 여자 화장실에서는 남자로 보여 경찰이 달려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농담 같은 에피소드의 주인공, 와다 아키코. 애칭은 악코짱이다.
와다는 1968년, 18세 때 데뷔했으니까 경력이 슬슬 40년에 가까운 일본의 톱가수이자 만능 탤런트다. 신인 가수들은 그녀 앞에만 서면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주눅이 들 정도로 하늘 같은 존재다. 팝송, 엔카, 리듬앤블루스, 재즈…. 어떤 장르의 무슨 노래든 그녀의 입을 거치면 그 묵직하고 힘있는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에서 오는 감동이 무대와 관중을 압도한다.
노래뿐만 아니라 와다는 방송진행자로서도 탁월하다. 매년 연말, 일본 연예계의 총결산이며 국민적인 행사로 열리는 NHK-TV의 <가요 홍백전>에서는 가수로서의 출전 경력만도 28회에다 수차례 사회자도 겸임해 멋지게 소화해냈다.
매주 일요일 낮에는 자기 이름을 붙인 <악코한테 맡겨!>라는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을 TBS-TV에서 벌써 이십 년이 넘게 생방송으로 진행중이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쇼 퀴즈 등 각 방송국을 종횡무진 누빈다.
물론 CF에서도 얼굴을 보인다. 악코짱의 CF는 종류는 많지 않아도 대부분 모델로서의 수명이 길다. 한마디로, 일본의 TV에 악코짱의 얼굴이 안 비치는 날은 하루도 없다.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 랭킹에서도 젊고 예쁜 친구들을 따돌리고 아직까지도 매년 상위를 고수한다.
그 이유에 대해 매스컴에서 공통적으로 꼽는 것은 그녀가 가진 카리스마다.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말)를 시간 장소 경우를 따져 잘 골라 사용해야 욕 안 먹는 게 일본이라는 나라다. 그녀는 이걸 잘 알텐데도 천의무봉이다. TV를 보면 언제나 빙빙 돌리지 않고 할 말이나 해야 할 말은 시원시원 해댄다. 예를 들면, 노래는 제대로 못 하고 춤만 잘 추거나 얼굴만 받쳐주는 소위 아이돌 가수들한테 “자네 가수 맞아? 무늬만 가수 아냐?”라는 식으로 에누리 없이 딴지를 건다.
그런데 이 가요계의 대모, 하늘 같은 왕언니가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올여름 어느 날, 갑자기 폭탄선언을 터뜨린 것이다.
“국적에 대해 많이 고민한 시기가 있었다. 과거의 일본은 지금처럼 (다른 나라, 남의 나라에 대해) 여유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나 자신이 (루트가 어디든) 와다 아키코라는 존재로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연예인 중에는 한국계가 많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람만 해도 엔카의 여왕으로 전후 일본의 국민 가수라 불리는 미소라 히바리가 그렇고, 미야코 하루미도 마찬가지다. NHK의 <가요 홍백전>에서는 한국계를 다 빼고 나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반농담처럼 통용되는 정도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스포츠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차별받고 싶지 않다는 본인의 의사 때문에, 또는 소속사의 마케팅 전략상 일본인으로 활동하는 게 득이 된다는 판단 아래 밝히지 않을 뿐이다.
일각에선 와다의 ‘커밍아웃’이 <주간문춘> 쪽에서 압력을 가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어차피 한국계라는 사실이 실릴 바에야 차라리 본인 스스로 밝히는 게 당당하지 않느냐는 설명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자기자신을 ‘다테마에’로 포장하지 않겠다는 와다 본인의 의지, 이미 확고하게 다져진 현재의 지위를 볼 때, 한국계라는 사실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 인터뷰의 여기저기에서 묻어난다.
현재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윤손하나 보아 같은 젊은 연예인들, <겨울연가> 붐으로 달구어진 한류 열풍, 이런시대상황이 한국에 대한 위상 자체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고, 동포 연예인들 또한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주간문춘>이 와이드 특집으로 ‘전후 60년, 중대사건의 목격자’라는 기획 기사를 실은 같은 호에 게재된 와다 아키코의 커밍아웃. <주간문춘>의 의도를 떠나서 해방둥이들이 환갑을 맞는 2005년 여름. 무언가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고 한다는 느낌이다.
송미혜 일요신문재팬 기자 ilyo-jap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