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 80%는 뇌물로 성사” 부패 폭로
▲ 볼턴 원더러스의 샘 앨러디스 감독이 취재진에게 BBC 방송이 보도한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해 부인하고 있는 모습. 아래는 볼턴 경기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로이터/뉴시스 | ||
설마설마했던 우려가 결국은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세계 3대 프로축구 리그 가운데 하나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난데 없는 뇌물 스캔들로 발칵 뒤집혔다. 올해 초 ‘승부 조작’ ‘심판 매수’ 등의 비리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이탈리아 세리에A의 파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터진 일이라 더욱 시끄럽다. 프리미어리그의 이번 스캔들은 세리에A의 스캔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세리에A가 승부 조작이나 불법 도박과 연관이 있었던 것과 달리 프리미어리그는 선수들의 이적과 관련해 현역 감독과 에이전트 사이에 뒷돈이 오갔다는 혐의다. 올해 초부터 프리미어리그 관련 인사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번 비리는 최근 영국 공영방송 BBC의 수사 프로그램을 통해 낱낱이 파헤쳐지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의 이적 시장에서 오간 돈은 무려 5980억 원. 3570억 원이 오갔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보다 많은 것은 물론, 이탈리아의 세리에A나 독일의 분데스리가보다는 서너 배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이런 숫자가 말해주듯 프리미어리그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하지만 돈이 모이는 곳에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부정부패가 따라 다니는 모양. 축구종가 잉글랜드도 결국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0일 BBC 방송의 수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파노라마>는 ‘축구계의 더러운 비밀’이라는 제목의 고발 프로를 방영했다. 주된 내용은 “현역 감독과 에이전트 사이에서 검은돈이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취재는 기자가 에이전트로 위장해서 인터뷰를 하는 ‘함정 취재’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18명가량의 전·현직 감독이 뇌물 수수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는 볼턴 원더러스의 샘 앨러디스 감독과 그의 아들이자 에이전트인 크레이그 앨러디스, 이번 시즌 1위로 깜짝 돌풍을 일으킨 포츠머스의 해리 레드냅 감독, 첼시의 유소년 담당 스카우트인 프랭크 아르네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명망이 자자한 앨러디스 감독이다. 한때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의 뒤를 이을 잉글랜드 사령탑으로 물망에 올랐던 그이기에 이번 스캔들은 축구팬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
에이전트인 테니 예리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선수 이적과 관련해 여러 차례 앨러디스 감독과 에이전트인 그의 아들 크레이그에게 뒷돈을 제공했다”고 실토했다. 또한 그는 앨러디스 감독이 볼튼의 감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종종 이적 시장에 깊숙이 개입해왔다고 폭로했다.
▲ 에이전트와 사전 불법 접촉 의혹을 받고 있는 포츠머스 레드냅 감독(왼쪽)과 볼턴 이적 과정에서 뇌물이 오간 것으로 알려진 나카타. | ||
또한 그는 일본의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토시, 나이지리아 출신의 미드필더 제이제이 오코차, 수비수 탈 벤 하임 등의 이적 과정에서 뇌물 수수가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크레이그는 에이전트로 위장한 BBC 기자에게 “선수 프로필을 받는 즉시 아버지 사무실로 직행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도 있어요. 아주 쉬워요, 쉬워”라고 으스대는 모습이 카메라에 그대로 잡혀 더욱 난처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방송을 본 크레이그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는 “그저 좀 과장해서 표현한 것일 뿐”이라며 주장하고 있는 상태.
앨러디스 감독 역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과감한 선수 영입으로 ‘제2의 첼시’로 불리며 리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포츠머스도 의혹의 중심에 있다. 해리 레드냅 감독이 블랙번의 수비수 앤디 토드를 데려오기 위해 에이전트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 그는 에이전트 해리슨에게 “토디가 참 마음에 들어. 그를 데려올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데려오고 말거야”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평소 친분이 있는 상대팀 코치들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에이전트와의 접촉을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첼시의 유소년 담당 스카우트인 아르네센은 미들즈브러의 10대 유망주인 나단 포리트를 데려오기 위해 담당 에이전트에게 15만 파운드(약 2억 7000만 원) 이상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애슐리 콜의 이적 당시에도 에이전트와 비밀리에 사전 만남을 갖고 불법적으로 작업을 벌였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사실 이번 BBC 방송의 프리미어리그 파문은 이미 예고된 바나 다름 없었다. 올해 3월부터 프리미어리그는 몇몇 구단의 감독과 에이전트 간에 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외부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 프리미어리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뉴캐슬 유나이티드, 미들즈브러, 볼턴 원더러스, 포츠머스 등 다섯 개 구단의 재조사를 의뢰했으며, 지난 여름부터 영국 경찰청은 감독과 에이전트에 관한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또한 한때 에이전트로 활동했던 스티븐 노엘-힐은 “잉글랜드 축구는 부패했다. 선수들의 이적 시장은 뇌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담컨대 이적의 80%는 뇌물로 성사되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또 다른 익명의 에이전트 세 명 역시 “뇌물을 받는 것은 프리미어리그 일부 감독들 사이에서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고 폭로했다.
이에 프리미어리그는 BBC 방송을 통해 수사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번 기회에 축구계의 부정부패를 철저하게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과연 앞으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얼마나 더 많은 구단이 폭풍에 휘말릴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