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본’에 푹 빠져 20년 늦었다
▲ 찰스 다윈은 남아프리카 바다에서 채집한 굴, 조개류 등의 표본을 연구하는데 빠져 필생의 역작 <종의 기원>의 발표가 늦어졌다고 한다. | ||
1840년에서 1841년 사이에 사실상 진화론 자체가 완성되었지만 발표하지 않았고, 1851년 그가 갑자기 병이 들었을 때도 역시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1858년 봄 책의 3분의 2 정도 분량인 10개 단원을 완성시킨 후 그 다음해에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이 20년의 긴 공백기간이 ‘다윈의 딜레이’인 것.
이러한 공백기를 둔 원인에 대해선 다양한 관측이 제기되어 왔다. 종교적인 처벌을 염려해서, 신앙심이 두터운 아내를 화나게 할까봐, 또는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그중 대표적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거센 비난과 응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기정사실로 굳어져왔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시각을 전면 부정하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존 반 화이히라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학자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다윈의 딜레이’의 원인을 종교적인 박해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것에서 찾고 있다. 즉 발표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지연됐다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 다윈은 영국 해군의 측량선인 비글호를 타고 남아프리카를 여행해 수집한 수많은 표본들을 종류별로 정리해야 했으며 굴, 조개와 같은 따개비 따위를 구분하는 데 거의 미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실제로 1837년 다윈은 진화론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으나 같은 자연주의자인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가 탐험을 하고 돌아와 해양생태물에 대해 다윈과 동일한 주장을 펼치는 바람에 진화론은 그의 관심 바깥으로 벗어났다.
존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들도 공개했는데, 그가 당시 썼던 편지, 책들,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 썼던 메모들을 보면 다윈이 외부에 진화론을 공개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잘 드러내준다고 한다. 존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다윈은 진화론을 비밀로 붙이지 않았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발표되면 많은 사람들이 비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혐오까지도 할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록들을 보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예상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일로 인해 자신의 이론을 수십 년 동안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왜 <종의 기원>은 완성된 지 20년이 넘도록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존은 “결론적으로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남아프리카 바다에서 채집한 표본들의 연구를 진화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문암 해외정보작가